민주화 격랑 속 법조인으로 … 안산서 노동 변호사 활약
▲ 전해철의 의원 학창시절
▲ 전해철의 대학시절. /사진제공=전해철 의원실
6·13 지방선거가 코 앞으로 다가오면서 경기도지사 선거에 나설 후보자들의 숨은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유권자들이 늘고 있다. 이에 인천일보는 도지사 출마가 유력한 후보들의 유년시절과 학창시절, 집안 환경, 정계 입문 과정 등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알아봤다. 전해철 더불어민주당 경기도당위원장, 남경필 경기지사, 이재명 성남시장, 양기대 광명시장, 심상정 국회의원(글 받은 순)에 대한 숨은 이야기를 차례로 게재한다.

▲목포가 낳은 전해철
전해철 더불어민주당 경기도당위원장은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나고 자랐다. 사범학교 출신인 아버지가 평양에서 생활하다 6·25전쟁으로 목포로 내려와서다. 당시 목포는 실향민인 아버지의 서러움을 감싸준 곳이다. 학교 생활도 좋았다. 운동을 좋아했고, 책 읽기와 글쓰기 그리고 토론회를 즐기던 아이였다. 또 말하는 걸 좋아하던 습관 때문인지 어릴 적 친구들은 그에게 "그때 말 잘하던 니 모습이 떠오른다"고 하는 친구들이 더러 있다.

▲지역감정 폐해 극복한 전해철
중학교말 급격히 기울어진 가세때문에 고등학교는 경상남도 마산시에 있던 큰형님 집에서 다녔다. 당시 큰형님이 마산에서 직장생활을 해 학비와 생활비를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는 그에게 고난이었다. 어린 나이에 고향과 부모 곁을 떠나 타향에서 살게 된 것 자체가 말이다. 더구나 600여명의 신입생 중 호남출신은 2명 정도에 불과했다. 말투와 억양이 다른다는 이유로 괜히 시비를 거는 친구들이 있었다. 친구 부모님 중에도 고향 얘기만 하면 그의 얼굴을 한번 더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출신에 대한 선입견과 그에 따른 편견이 지역감정의 폐해란 것을 어린 나이때부터 몸소 체험했다. 다행히도 1년 정도 지나자 친구들과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결국 출신 지역이 문제가 아니라 개개인의 품성이나 인격 등이 중요하단 걸 느꼈던 시절이었다.

▲민주화 격랑 속, 법조인 전해철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면서 '법이 정의라면 법조문은 서민의 눈물로 채워져야 한다', '민주주의 실현에 도움이 되는 법률가가 되겠다'는 나름의 철학을 세웠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위해 살겠다고 결심했다. 시위에도 곧잘 참여하고 서클과 공부모임에서도 활동했다. 다만 학생운동 주류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생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결국 그러진 못했다.
그래서 과 동기와 선후배들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헌신하는 모습을 볼때면 함께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미안함이 가득했다.

특히 1987년 제29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2차시험을 준비하던 그로서는 '87민주대항쟁'을 먼발치에서 바라볼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결코 당신들을 잊지 않겠다'라는 다짐속에 사시를 통과했지만 시대적 아픔을 함께 하지 못한 미안함을 덜어내기엔 부족했다. 아직도 가슴한켠에 쌓여 가끔씩 콕콕 찌른다.
그 아픔때문이라도 그는 1988년 사업연수원 19기로 입학하면서 학회를 결성하는 등 법조인으로서 사회민주화에 기여하기 위해 구체적인 방향을 결정했다. 노동자와 인권을 침해 받는 사람 등 소외계층과 약자들을 위한 변호활동을 말이다.

▲안산에서 시작한 인권·노동 변호사 전해철
1993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의모임(민변) 소속으로 활동하며 공단 노동자들이 많은 안산으로 내려가 활동하기로 했다. 당시 민변에서는 지역 도시 중 법원이나 검찰청이 없는 곳에 변호사 사무실이 하나도 없는 '무변촌'이 많다는 점을 착안, 소속 변호사들에게 지역 사무실 개소를 권장했다. 안산의 경우 반월공단과 시화공단 주변에 노동자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공단도시였는데 특히 3D업종에 종사하는 영세사업장의 노동자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았다. 이들의 인권·노동 법률상담을 위해 사무실을 개소했다. 그게 바로 법무법인 '해마루'였다. 이 당시에 노무현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다.
전 위원장은 2000년 전두환 군사정권시대의 대표적인 여론조작 사건인 '수지킴 사건'을 의뢰받았다. 이미 사건종결된 지 15년이 된 후로, 고문 후유증과 홧병으로 수지킴의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남매들은 회사에서 쫓겨나는 등 한순간에 폐인이 된 상황이었다. 3년여의 기나긴 법정 싸움 끝에 남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수지킴이 오히려 국가기관에 의해 간첩이 된 사건임을 밝혀냈다.

▲청와대로 간 시민 변호사
민변 활동을 하다보니 정치적인 사건과 관련될 때가 있지만 정치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97년 대선에서 '국민승리21' 법률지원단으로 활동하며 권영길 당시 후보를 돕기도 했으나 이 역시 사회운동의 일환으로만 여겼다.
그러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당시 후보를 지원하는 변호사 모임(노변모)을 결성해 법률지원에 나섰다. 이때부터가 제대로 된 정치참여의 시작이다. 2004년 이후 민정비서관과 민정수석으로 일했다. 이같은 노 전 대통령의 인사기용 이면에 대해 그는 검찰·경찰·국정원 등 권력기관은 법률과 규정에 따른 역할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과 또 권력을 남용하지 않는 기관을 만들면 된다는 점에서 검찰 출신이 많은 자리인 민정수석에 기용한 것으로 판단했다. 어깨가 무거웠지만 그만큼 성실하게 일했다. 특히 배심원제의 일종인 국민참여재판을 시행할 수 있도록 법제화하고, 법학전문대학원 설립에 관여했다.

▲상식과 원칙의 사회에 일조한 사람
청와대를 나온 직후 18대 총선에 도전했다. 참여정부 말기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좌하던 사람들끼리 참여정부의 가치를 계승해야 한다는 공감대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그의 도전은 불발됐다. 대신 안산지역 지역위원장으로 지역 주민들과 함께 하는 생활정치와 지역의 주요현안을 해결하는 정책정당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후 국회에 입성하고 재선에 성공했다. 전 의원은 국민정부와 참여정부 시절 시작한 사법개혁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그래서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에 일조한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최남춘 기자 baikal@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