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오늘,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 의해 언론사 통폐합이 결정되었다. 흔히 이 작업을 진두지휘한 것으로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허문도를 떠올리지만, 그는 이를 개념화했을 뿐 실무는 보안사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5월 광주를 피로 진압한 전두환은 1980년 11월 14일, 계엄해제 이후 발생할지도 모를 반발을 사전에 정리하기 위해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언론통폐합'과 '언론인 숙청'을 결정한다. 이 공작을 막후에서 진두지휘한 사람은 당시 보안사 준위로 근무하던 이상재였다. 본래 대공처에서 일했으나 10·26사건 이후 언론검열을 책임진 정보처에서 근무하며 언론 통폐합과 언론인 숙청을 책임졌다. 그는 실명 대신 '강기덕 전무'라고 행세하고 다녔다.

검열 책임자로 시청에 앉아 신문, 방송, 잡지 편집자들이 들고 오는 원고에 검은 매직을 그어가며 검열했고, 나중엔 언론통폐합과 해직을 주도했으니 염라대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80년 11월 12일 각 언론사 대표들을 태운 승용차가 보안사에 집결했다. 언론 사주들은 막강실세였던 보안사 사령관을 만날까 기대했지만, 정작 그들이 안내된 곳은 으스스한 보안사 지하실이었다. 그들 앞에는 한 장의 종이가 놓여 있었다. 언론사 포기각서였다. 이날 보안사는 45개 언론사 사주로부터 52장의 포기각서를 받아냈다. 조금이라도 저항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동빙고 분실로 모실까요?" 한 마디면 끝이었다. 중앙지는 7개에서 6개로, 지방지는 14개에서 10개로, TBC는 KBS로 흡수·통합시키는 이른바 'K공작'이었다. 당시 보안사는 전두환 정권에 반대할 것으로 의심되는 언론인 900명의 명단을 각 언론사에게 넘겼다. 사주들은 평소 거슬리던 언론인을 더 얹어 무려 1500명을 해직시켰고, 이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동료들을 쳐낸 언론인들은 훗날 국회의원이 되는 등 출셋길을 달렸다.

이상재 준위 역시 공로를 인정받아 1981년부터 1985년까지 민주정의당 사무차장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1985년 12대 국회에서 전국구 의원, 14대 민자당 의원이 되었다. 훗날 그는 사심 없이 조직의 명령에 충실히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런 이들이 우리 언론에 드리운 그림자가 참으로 짙다.
/황해문화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