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산 게이는 저서 <나쁜 페미니스트>에서 텍사스 주의 클리브랜드에서 벌어진 열한 살 소녀 집단 성폭행 사건을 둘러싼 매체의 보도 내용에 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제발 사건의 본질을 흐리지 말자. 이 사건은 열한 살 어린이의 육체가 갈가리 찢긴 사건이지, (…) 그녀를 강간한 남자들의 인생이 산산조각난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다."

이 말을 최근 사건에 적용해 볼 수 있겠다. 한샘의 여직원 A가 같은 회사 교육 담당자 B에게 성폭행 당했다고 주장했다. A가 B에 성폭행 사실에 대한 법적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인사팀장 C가 개입했다. C는 A에게 B가 30대 초반이며 감방 들어가고 성폭행 범죄자란 기록이 남으면 앞으로 재취업은 물론 정상적으로 살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고 한다.

가해자에 이입하는 논리를 펼치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다. 지난 8월 인하대 의대생들의 여학생 집단 성희롱 사건에서 학교 측에 의해 징계를 받은 가해자 중 일부는 법원에 징계무효확인 소송을 냈다. 이에 법원은 가해 학생들이 정학 처분을 받으면 수업을 들을 수 없으므로 정학 이상의 가혹한 결과를 받는다는 이유로 징계 효력을 일시 중단시켰다. 그러나 처벌 단계에서 갱생을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범죄의 사실은 누군가의 권리가 침해를 당했음을 의미한다. 침해를 당한 이의 권리에 대한 적정한 법적 조치를 취하는 것이 최우선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가해자의 권리를 일정기간 박탈하는 것은 처벌로서 유효할 수 있다.

가해자가 사회로 제대로 복귀할 수 있는가에 관한 논의는 그 다음의 문제다. 선처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성폭행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침해당한 권리에 대한 조치 없이 '동등한 인권'을 논할 수는 없다. 인권은 동등하기에, 유린을 당한 인권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가해자의 갱생을 우려하는 일은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다. 피해자가 정상적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과정에서 처벌과 (가해자의) 갱생에 관한 논의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