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서임권은 교회와 세속 권력 모두에게 큰 이해관계가 달린 문제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 사이에 일어났던 '카노사의 굴욕' 역시 교회개혁과 성직서임권을 둘러싼 갈등이 폭발한 것이었다. 교회개혁을 추진하다가 황제에게 패배한 교황은 유배지에서 죽음을 앞두고 "정의를 사랑하고 부정을 증오하였기에 유배를 당하고 죽음을 맞이한다."는 말을 남겼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스스로 교회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가 있었으나 세속권력과의 야합하면서, 또는 스스로의 기득권을 놓지 못했다. 성직은 돈벌이와 권력을 추구하기에 좋은 자리였기에 귀족들은 황제와 교황에게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기꺼이 성직을 구매했다.

독일 브란덴부르크의 귀족 알베르트 역시 거액의 자금을 대출해 마인츠의 대주교직을 구매했다. 투자금을 손쉽게 회수할 방법을 찾던 그의 눈에 띈 것이 이른바 면벌부(indulgence) 장사였다. 그는 성 베드로성당 건축자금이 부족했던 교황과 면벌부를 팔아 이득을 반반씩 나누기로 하고, 당시 도미니쿠스 수도사이자 유명한 설교자였던 요하네스 테첼을 최고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는 전국의 교회를 다니면서 탁월한 언변으로 '동전이 헌금함에 짤랑 하고 떨어지면 연옥에서 고통 받는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설교를 늘어놓았다. 그의 설교를 들은 수많은 신자들이 면벌부를 구입했다. 성직을 사고팔고, 거대한 교회건축물 건설에 혈안이 된 교회의 모습을 목도한 당시 34세의 수도사 마르틴 루터는 500년 전 오늘 1517년 10월 31일,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내걸었다. 그날 이후 교회와 서구문명의 향배가 달라졌다. 로마제국 변방의 식민지, 사막으로 둘러싸인 척박한 땅에서 태어나 일생을 가난하고 병든 자, 눌린 자들과 소외당한 자들을 돌보고 보살피다 마침내 인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혔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개혁의 정신이었다.

교회개혁을 추진했던 사람이 마르틴 루터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성장 위주의 교회, 호화롭고 거대한 교회 건축, 십일조 헌금에 눈이 멀어 그 정신으로부터 멀어진다면 마르틴 루터가 결코 마지막일 수도 없을 것이다.
/황해문화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