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신짜던 고씨·부채장수 이씨 … 타지 출신 '세 집'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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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두포평야는 지금 벼가 한창 익어가는 중이다. 마니산 앞으로 펼쳐진 논의 벼가 겨자색을 띠고 있다. 저 빛깔이 황금색이 되는 10월 말쯤 선두포에선 벼베기가 진행된다.
가을햇살을 받은 벼메뚜기가 펄쩍 뛰어올랐다. 인기척을 느낀 모양이었다. 메뚜기는 불안한 자세로 벼 위에 착지했다. 긴 뒷다리를 허공에서 폈다 접었다 하며 몸을 추스렸다. 지난 여름 초록색이던 벼메뚜기는 벼와 같은 빛깔로 변하고 있었다.

코넬리어스 오스굿은 1951년 연구서에서 1947년 선두포에 머물 때 자신이 목격한 몇 사람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가 '마을의 사회적 구조' 챕터에서 묘사한 당시 선두포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선두포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기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타지 출신은 단 세 명밖에 없다.

우선 고씨 노인의 사위가 그 중의 하나이다. 고씨 노인은 늘 집 문앞에서 짚신과 멍석을 짜며 앉아 있곤 한다. 그의 나이는 쉰하나이지만 살면서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더 늙어 보인다. 고씨 노인은 아들이 없다. 그의 부인은 그에게 딸을 하나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갔다. 딸은 최씨성을 가진 같은 길상면 초지리 사람과 결혼했다. 사위는 성을 고씨로 바꾸지 않아서 고씨 노인의 손자 손녀들은 모두 고씨인 그의 성과 다르다. 손자 손녀가 최씨라면서 그는 가끔 슬퍼한다.

유씨는 1944년 다른 리에서 선두포로 이주했다. 그는 선두포 근처에 논을 가지고 있었는데 논에서 가까이 살수록 편리했기 때문에 , 마을 끝에 있는 빈 집을 구입했다. 유씨는 부인 그리고 딸 셋과 함께 산다.

세 번째 외지인은 유씨와 같은 해에 선두포로 왔는데 그가 이 마을로 오게 된 사연은 훨씬 더 특이하다. 나이가 일흔인 그는 아주 젊었을 때 부모로부터 받은 유산을 모두 잃고 일생 동안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녔다고 한다. 대전 이씨인 그는 가족을 제외하고는 마을에 친척이 하나도 없다. 부채 장수인 그는 원래는 북쪽 지방 출신이다. 마을의 논 끝 쪽에 있는 수로 주변에서 부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들을 쉽게 구할 수가 있어 선두포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는 땅이 전혀 없어 부채 판매 수입으로 집세를 내고 있다. 부인, 딸, 손자와 손녀를 각 한 명씩 데리고 산다. 사위는 현재 집을 떠나 있다. 여러분이 선두포에 산다면 이 부채장수 노인에게서 부채를 아주 싼 가격에 살 수 있을 것이다.

2017년 9월 현재 고씨 노인의 외손자가 선두포에 살고 있다.(인터뷰 참조) 그는 선두포에서 8년간 이장을 지낸 최병열씨다. 그의 부친은 황산도 출신의 최추봉이고 어머니는 제주 고씨 흥인이다. 최씨, 고씨 부부는 3남3녀를 낳았다. 외할아버지는 딸만 넷이어서 막내딸인 그의 어머니 남편을 데릴사위로 얻었으나 끝내 성을 바꾸지 않았다.

유씨의 이름은 유항민씨로 딸이 셋 있었다. 여기서 막내딸 유미숙씨의 남편 고동순씨가 데릴사위로 들어왔다. 고동순씨는 마을노인회장을 지내고 있다.

부채장사를 했다는 대전 이씨는 부채를 만들고, 부인이 장사를 했다. 이씨는 나중에 추월이라는 딸과 둘이 살았다고 선두포 사람들은 말한다.

1947년 27가구 169명이 살던 선두포는 가구는 40여 가구로 늘어난 반면 인구는 80여명으로 감소했다. 그 가운데 3분의 1 정도는 직장생활을 하거나 귀촌한 사람들이다. 과거에 대부분 농사가 생계였다면 지금은 직업군이 다양해졌다. 당시 한 가구당 최대인원은 11명이고 최소 인원은 4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2명인 가구가 많다. 대부분 연세가 지긋한 노인들이다.

마을 어르신들과 얘기를 나누다 선두포 평야를 바라본다. 쌀알을 주렁주렁 매단 채 축 늘어진 벼에서 지난 여름 자식을 키우듯 애쓴 선두포 농민들의 땀이 배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한 달 정도만 지나면 '강화섬햅쌀'을 맛볼 수 있다. 볏잎 위로 가을의 전령사 고추잠자리들이 날아다닌다. 가을햇살이 따갑게 내리쬐었다.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인터뷰 / 최병열·신춘분 부부

70년 전 정착한 고씨 … 이젠 외손자가 토박이


"오스굿이 언급한 그 고씨 노인이 우리 외할아버지요. 우리 외할아버지가 딸만 넷이었는데 우리 어머니가 막내셨어. 그런데 우리 아버지를 데릴사위로 들인거야."

선두포 토박이 최병열(70)씨는 오스굿의 연구서에 등장하는 고씨 노인 얘기가 나오자 "엇, 여기 고씨는 우리 외할아버지 밖에 없는데"하며 손바닥을 쳤다.

그는 다른 마을에서 온 유씨와 대전 이씨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경주 최씨다. 선두포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그의 집안 역시 대대로 농사를 짓고 살았다.

"옛날엔 3가마 나오면 2가마 농사지은 사람이 먹고 1가마는 땅을 빌려준 사람에게 줘야 했지. 정말 배가 많이 고팠어."

지금이야 쌀이 남아돌지만 40~50여년 전만해도 늘 배가 고팠다. "주로 밀기울을 섞어 먹었어요. 누이들은 남의집에 보냈는데 밥 한 끼 먹이기가 힘이 드니까 한 명이라도 입을 줄이려고 그런거여." 선두포 사람들의 여자형제들은 일찌감치 시집을 가거나 도시로 식모살이를 나갔다. 월급도 없이 밥만 먹는 조건이었다.

부인 신춘분(65)씨는 강화도 건너 김포가 고향이다. 부부는 75년 봄 중매로 만나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 한눈에 반한다. 한동안 편지를 주고받다 같은 해 11월 결혼에 골인한다. 그렇게 42년을 살았다.

"강화여자들이 강단이 있어요. 강화여자들은 농삿일도 남자들과 똑같이 하더라고. 나는 김포출신인데 김포여자들은 지게를 안 지거든요."

태어나 지금까지 한 번도 고향을 떠나지 않은 최씨는 김포 출신의 신춘분씨와 사이에 3남1녀를 뒀다. 모두 출가해서 외지에서 살고 있다.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