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기름 냄새 좀 맡고 와라!" 감독이 슬럼프에 빠진 선수에게 2군행을 지시했다. "두바이 다녀올게" 동료들에게 이 말을 남기고 선수는 짐을 쌌다. 그는 한동안 기름 냄새를 맡으며 수없이 배트를 휘두르고 공을 던져야만 했다. 2000년대 초반 SK와이번스야구단의 2군 훈련장은 남구 용현동의 옛 SK정유 저유소(貯油所) 안에 있었다. 대부분 물류 창고로 사용했지만 여전히 곳곳에 커다란 기름 탱크들이 있었다. 지금의 용현SK스카이뷰 아파트단지이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에 군수공장 히다치(日立)가 있었고 광복 후에는 POL(Petroleum Oil Lubricants)이라 불린 미군유류보급창이 있었다. 인천항을 통해 들여온 기름은 이곳 탱크에 저장했다가 각 지역 미군부대로 보냈다. 1968년 미8군으로부터 인수해 석유공사의 인천저유소로 활용했다. 이어 유공, 선경 그리고 SK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때 광활한 나대지 한 귀퉁이에는 부천유공축구단과 SK야구단의 연습장이 들어섰다.

서울 마포에도 커다란 기름 탱크들이 있었다. 1973년 중동전쟁으로 촉발된 1차 석유 파동 때 안정적인 석유 공급을 위해 건설된 석유비축기지다.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됐던 1급 보안시설이었다. 인근에 상암월드컵경기장이 들어서면서 위험시설로 분류돼 2000년에 폐쇄되었다. 이 석유비축기지가 '문화비축기지'로 변신해 문을 열었다. 개장 다음날 서둘러 가보았다.

가솔린, 디젤, 벙커C유 등을 채웠던 6개의 탱크를 최대한 원형을 살려 갤러리, 공연장, 커뮤니티센터 등 복합문화공간으로 재생했다. 싹 쓸어버리고 개발했던 과거의 공공건축과는 달리 옛 것의 독특함을 유지해 역사와 이야기를 '비축'했다. 보는 내내 탄성이 절로 나왔다. 건축물은 유한한 인생을 대신해 묵묵히 그곳을 지키며 인간사를 붙잡아 둔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용현동 SK스카이뷰 단지 앞을 지났다. 총 26개동 3900여 가구의 아파트는 모래사막에 쌓은 두바이처럼 거대했다. 그러나 그 '뷰'는 드라이하기만 했다. 도시 재생의 빈곤한 상상력을 탓할 뿐이었다.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