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6일은 현충일(顯忠日)이다. 현충일은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숨진 순국선열을 기리기 위하여 지정된 날이다. 그러나 1949년 6월6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생각한다면, '현충(顯忠)'의 진정한 의미와 무엇을 위한 현충이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날 아침 윤기병 중부경찰서장이 지휘하는 경찰 50여명은 실탄을 장전한 권총으로 무장한 채 서울 남대문로에 있는 한 사무실을 급습했다. 사무실로 난입한 경찰들은 총을 빼들고 "여기 있는 놈들은 빨갱이들이니 모조리 끌고 가라"며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붙잡아 두들겨 패면서 끌고 갔다. 경찰은 이날 35명의 직원과 이들이 사용하는 호신용 무기, 통신기기, 서류 등 일체를 압수했다.

이 날 잡혀간 사람들은 심한 고문을 당해 그중 22명이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과연 이들은 얼마나 무서운 죄를 저질렀기에 이토록 혹독한 대접을 당했던 것일까? 1948년 9월7일 제헌국회는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악질적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만들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이른바 '반민특위'를 설치한다. 반민특위 산하의 특별경찰대(특경대)는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악질기업가 박흥식을 비롯해, 최남선, 이광수 등을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위기를 느낀 친일경찰 노덕술 등은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고용해 대법원장(김병로), 검찰총장(권승렬), 국회의장(신익희)을 비롯해 반민특위 위원들을 납치해 38선 인근으로 끌고 가 살해할 음모를 꾸민 것이 발각되기도 했다. 1949년 6월4일 반민특위는 친일경찰 최운하를 체포했지만, 내무차관 장경근은 그의 석방을 요구했고, 이를 거절하자 경찰을 동원해 반민특위를 공격한다.

국회는 이날 오후 반민특위의 원상복귀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 습격은 자신이 직접 지시한 것이라면서, 특위의 활동으로 인해 민심이 혼란하므로 부득이하게 특경대를 해산한다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후 백범 김구 선생마저 암살당하면서 반민특위 활동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고,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친일파 청산은 우리 역사의 가장 큰 숙제로 남았다.

/황해문화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