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민중혁명 결과로 바라봐...적폐청산 핵심으로 '공안' 꼽아
▲ <황해문화-여름호> 새얼문화재단 392쪽, 9000원
빅데이터 분석통한 '촛불 민심'.오도된 법치주의 개혁 등도 다뤄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2017년 3월10일,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이 말을 듣기까지 최초의 범국민행동(이하 촛불집회) 이래 19주가 걸렸다. 조직도, 배후도 없는 촛불시위 참가자가 1600만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단일한 대오도, 단일한 주체도 살펴볼 수 없었지만, 촛불을 '혁명'이라고 불렀다.

인천에서 발행하는 전국적 계간지 <황해문화> 여름호(통권 95호)가 나왔다. 여름호는 '촛불과 그 이후의 과제들'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다.

적폐의 근원을 '48년 체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의 이면에는 반대파를 종북으로 몰아세우는 공안체제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공안체제는 현재 대한민국 사회가 겪고 있는 모든 적폐의 근원이며 재생산 기지인 셈이다.

이번 <황해문화> 여름호 특집은 2017년을 환하게 밝힌 촛불을 단속(斷續)적이거나 일회적인 분기(憤氣)가 아닌 때로 적폐와 타협하고, 때로 안보논리에 순응했으나 궁극적으로는 이에 저항한 민중의 '장구한 혁명'의 결과물로 바라본다.

민주화를 통해 군사독재를 벗어났지만, 독재의 저변에 흐르던 분단체제는 더 공고화됐다. 안보를 빌미삼은 비판세력에 대한 '종북몰이' 등 우리 사회에 쌓인 적폐는 씻겨나가지 않았다.

권력과 관료사회가 적폐가 되지 않도록 책임을 다해야 하는 권력기관인 검찰과 그 출신 인사들이 도리어 적폐의 근원이 된 역사는 그 자체로 문민정부 출현의 역사이자, 민주화 30년의 역사였다.

적폐 청산은 단순히 인적 청산, 제도 개혁만으로 담보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가 공격받을 때 시민들 각자가 너나할 것 없이 스스로 불꽃이 되어 광화문 광장을 사수했던 것처럼 시민들이 깨어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일상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될 것이라고 책은 강조한다.
촛불을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무혈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 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결코 무혈혁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1980년 오월 광주로부터 2014년 사월 세월호에 이르는 희생이 없었다면, 그토록 장구한 피흘림이 없었다면 오늘의 민주공화국은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총론에 해당하는 한홍구(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의 '적폐청산의 시발점, 공안체제의 해체'는 국가안보를 빌미삼아 권력을 농단해온 관피아 가운데 공안마피아가 적폐의 핵심임을 보여준다.

민주화로 권력은 군부에서 국정원 같은 정보기관으로 넘어갔다가 이후 민주화가 진척되자 공안권력의 핵심은 검찰이 되었다. 공안권력의 핵심을 국정원 같은 정보기관을 넘어 검찰이 차지하게 되는 계기는 김기춘 검찰총장·법무장관 시대이다.

청와대와 내각, 안기부와 집권여당 내부에서 검찰 출신 인사들이 정권의 위기를 돌파하는 묘수로 등장시킨 것이 바로 '유서대필사건'이었다. 1991년 5월, 분신정국은 노태우 정권으로서는 존망이 걸린 절대절명의 위기였다. 노태우 정권은 유서대필 사건이라는 과거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공안조작 사건을 통해 이 위기를 돌파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공안 출신 검사들은 과거 권력의 외곽에서 심부름을 하던 집단에서 직접 메뉴를 짜고, 장을 보고 요리를 하는 셰프가 되었다. 이들은 오늘 우리가 알고 있듯 지난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의 법률자문단에 대거 참여했다. 민주화 이후 적폐를 청산하라고 칼자루를 쥐어주었지만 그들은 주인인 국민을 상대로 그 칼을 휘둘렀다.

공안은 공안기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독재 치하에서 오래 살다보니 한국사회 전체가 공안적 사고방식과 관행에 너무나 익숙해져버렸다. 시민 개개인이 공안적 사고를 거부하는 인권감수성을 높여야 하고, 사회 전체적으로도 민주적 가치가 실현되도록 애써야 한다. 한국사회가 지금 이 지경이 된 것은 보수진영 내에서 자신의 양심과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이 사라져갔기 때문이다.

한국사회가 오랜 독재를 거치면서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 이후 사회 전체의 우경화, 공안화를 아직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한국사회가 이렇듯 공안의 포로가 된 것은 세계적 차원에서의 냉전의 종식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냉전이 그대로 존속, 아니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김학준(㈜아르스프락시아 미디어분석팀장)의 '빅데이터를 통해 바라본 촛불 민의·탄핵으로 가는 길, 탄핵 이후의 소망'은 최초의 촛불이 타오르기 이전부터 탄핵에 이르는 과정에서 민심과 민의의 추이를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빅데이터를 통해 살피고 있다. 촛불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이 분석에 따르면 문제의 '최순실 태블릿PC' 보도가 JTBC에서 있기 전이었던 지난 2016년 9월26일부터 시작한다. 박근혜 정부의 켜켜이 쌓여온 적폐의 민낯은 이날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날은 이화여자대학교 미래라이프대학설립을 둘러싼 학생들의 반발이 지속되고, 2015년 11월 민중총궐기에서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던 백남기 농민이 세상을 떠난 다음 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아직 작은 나비의 날갯짓에 불과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흔들림이 없었고, 일부에선 이화여대 학생들의 학벌순혈주의를 비판했다. 백남기 농민의 유가족들에 대한 조롱도 있었다. 그러나 애처로운 나비의 날갯짓은 JTBC의 태블릿PC 보도와 맞닥뜨리며 태풍으로 성장했다.

단지 이뿐이었을까? 빅데이터 분석은 그 이면에 감춰진 민심을 보여준다. 촛불 민심의 마그마는 이미 2014년 4월16일부터 분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촛불은 바람만 불면 꺼지는 약한 불꽃이 아니었고, 횃불도 아니었다. 저 깊은 곳에서 언제라도 권력의 약한 고리를 뚫고 분출할 장소와 기회를 노리는 뜨거운 용암이었다.

김종철(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오도된 '법치주의' 개혁을 위한 과제·사법권의 역할과 조건을 중심으로'는 한국형 시민혁명이라 할 수 있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3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지금의 대한민국사회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김진호(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는 ''태극기집회'와 개신교 우파·또 다시 꿈틀대는 극우주의적 기획'에서 태극기집회가 열리는 그 광장에는 극우적 기독교의 흔적이 깊게 새겨 있다고 말한다.

이번 비평 사드와 공안정치에 관한 비평도 눈에 띈다. 392쪽, 9000원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