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에서 쇠뿔고개 오르막을 따라 걷다보면 마을 한가운데로 넓게 펼쳐진 풀밭이 나타난다. 풀숲 사이로 주민들이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텃밭도 눈에 띈다. 이곳의 내력을 모르고 지나친다면 그저 도심 속 한가로운 풍경으로 비춰지겠지만 공간이 주는 평온함 속에 주민들의 아픔이 담겨 있다. - 배성수의 <시간을 담은 길>

지난 토요일 배다리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배다리 생태놀이 숲에 가보았다. 텃밭에는 대파가 자라고 있었고, 철쭉과 유채, 이름 모를 풀들로 봄기운이 완연했다.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던 놀이터의 놀이시설 철거만 아니라면 따스한 햇살 속에서 고즈넉하게 봄을 맞을 수 있는 곳이었다. 배다리 생태놀이 숲은 10년 전 산업도로를 내려다가 여러 이유로 도로 건설이 중단되면서 주민들이 채소, 꽃을 심는 등 자발적으로 이곳을 가꿔나가기 시작했고, 작년 10월에는 놀이시설 10여개를 설치하고 생태놀이 숲이라는 이름도 붙였다. 아이들이 슬슬 몰려들면서 꿈꾸는 놀이동산이 되었고, 지역 주민들의 쉼터가 되었다. 하지만 얼마 전 숲이 철거되었다.

주민들이 배다리의 헌책방 거리를 지켜내고, 배다리만의 고유한 색체와 분위기를 만들어내니 드라마 촬영지로도 이용되었다. 그러다보니 구에서 슬슬 욕심이 났던 것인가. 문화영향 평가에서 낙제점을 받은 근대역사문화마을 조성을 강행하려고 하면서 지역주민들과 상의도 없이 놀이터를 철거해버린 것이다.
중구도 그렇지만 동구는 다른 지역과 분명히 다른 문화 역사적 유산을 가진 곳이다. 생태놀이터에 일괄적으로 유채나 양귀비꽃을 피워놓고 이 얼마나 보기 좋은가 사진을 찍는 곳이 아니다. 어디가 연꽃마을로 이름을 날린다고 하면 지자체에서 너도나도 연꽃을 심고, 벽화마을이 인기를 끈다고 하면 너도나도 따라하는 이런 행정을 벌이는 곳이 아니다.

역사의 숨결은 인위적으로 조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항기, 그 이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취와 숨결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공간이야말로 그대로 역사가 된다는 걸 알아야 한다. 산업도로가 날 뻔한 그곳, 전철이 다니는 철길 외벽에 햇살을 받은 플래카드가 펄럭인다. '동구의 배다리, 우리가 지키고 가꿔낼, 인천의 역사입니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