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중략) 내 주위에는 많은 학생들이 출렁이고 그들은 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론 모자라 ××학원, ○○학관, △△학원 등에서의 별의별 지식을 다 배웠을 거다. 그러나 아무도 부끄러움은 안 가르쳤을 거다. 나는 각종 학원의 아크릴 간판의 밀림 사이에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깃발을 펄러덩펄러덩 훨훨 휘날리고 싶다. 아니, 굳이 깃발이 아니라도 좋다. 조그만 손수건이라도 팔랑팔랑 날려야 할 것 같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고. 아아, 꼭 그래야 할 것 같다. 모처럼 돌아온 내 부끄러움이 나만의 것이어서는 안 될 것 같다.' -박완서 소설가의 소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생각해보면 작년 12월부터 온 국민은 전대미문의 일을 겪어야 했다. 대통령은 국정을 농단했고,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시위는 장기간 이어졌고, 시민들은 토요일에 더 이상 여유롭지 못했다. 영화도 보지 않았고, 가족과 다정하게 시간을 보내기도 어려웠다. 날이 가면서 태극기를 흔들며 탄핵무효를 외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국민의 분열은 극에 달했다. 한 집안에서도, 직장에서도, 모임에서도 시국에 관해 얘기를 꺼내면 화를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됐다. 술자리에서 안주를 시킬 필요가 없었다. 씹기 좋은 안주가 상시 대기하고 있었다.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전원의 만장일치로 박근혜 전 대통령을 파면했고, 그녀는 청와대를 떠나 사저로 들어갔다. 외신은 한국 국민의 높은 민주주의 의식을 칭찬했다. 그런데 이 일이 벌어질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알 수 없는 일이 있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나라가 이 지경으로 혼란하고 국론이 분열됐다면 어떻게든 수습을 하려고 노력했어야 하지 않는가. 전 국민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지는 못할망정 서로를 미워하고 불신하며 불행하게 만든 최소한의 책임이라도 있다면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는가. 그녀는 끝내, 어디에서고 부끄러움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는 것처럼, 아예 그런 말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얼굴이었다. 한 주 내내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깃발을 펄러덩펄러덩 훨훨 휘날리고 싶은 심정은 나만의 것이었을까.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