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원의 사람냄새] 故 베네딕트 앤더슨 선생에게 
[전성원의 사람냄새] 故 베네딕트 앤더슨 선생에게 
  • 이인수
  • 승인 2017.03.14 00:05
  • 수정 2017.03.14 12: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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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공동체>를 통해 민족주의 연구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제시했던 세계적인 석학 故 베네딕트 앤더슨(1936~2015)은 지난 2015년 4월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황해문화>와 가진 좌담에서 유럽과 달리 아시아에서 여성 정치인이 최고 지위에 오르는 경우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된 결과가 아니라 권력의 정점에서 목숨을 빼앗기고 좌절한 부친이나 남편의 후광 효과 덕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들 거의 모두는 정직하게든 아니든, 조직된 정당과 대중주의적 선전, 그리고 자신들의 남편이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선거에서 이겼다"면서 "많은 경우 자수성가한 시민들이기 보다는 '공주'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 역사 속 현실을 살펴보더라도 같은 식민 체험과 독립을 경험한 아프리카 지역과 달리 아시아에서는 유난히 전직 대통령의 딸이나 부인이 최고 통치자가 된 사례가 많았다. 이것은 가부장적 민족주의가 강한 지역적 특색이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네루 총리의 딸 인디라 간디는 암살될 때까지 인도의 총리였고, 베나지르 부토도 파키스탄 총리였다가 처형된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총리가 됐다. 인도네시아의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대통령도 군부에 의해 연금된 상태에서 숨진 수카르노 대통령의 딸이었고,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도 아버지가 필리핀 대통령이었다.

그런가하면 남편의 후광을 입은 여성정치인들도 있었다. 스리랑카의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총리는 전 총리의 부인이었고, 코라손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 역시 마르코스 일당에게 암살당한 남편 베니그노 아키노 2세의 후광이 있었다. 살해당한 남성 지배자의 딸과 암살당한 통치자의 아내가 최고 권력에 선출되는 후진적 인정주의(人情主義)는 대한민국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됐다.

그러나 실망하기엔 아직 이르다. 비록 최초의 생물학적 여성 대통령은 실패했지만, 머지않은 장래에 후광이 아닌 자신의 정책과 비전으로 그 자리를 책임질 여성 대통령을 기대한다. 故 베네딕트 앤더슨 선생에게 오늘의 대한민국을 보여주고 싶다.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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