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연백군 청룡면 학산리 노은재.' 묘비에 새긴 선친의 고향 주소다. 지난주 설 성묘 때도 입을 모아 읊었다. 선친께서도 생전에 성묘할 때마다 자식들에게 필자의 조부 비석에 적힌 이 주소를 또박또박 읽게 했다. 이제 나는 그걸 내 아이들에게 시키고 있다. 어렸을 적 선친이 이것을 읽으라고 하면 건성으로 했다. 지금은 황해도의 '황'자만 읽어도 콧등이 시큰하다. 언젠가 자식들이라도 그곳을 꼭 가보리라는 당신의 절절한 소원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남한으로 피난 내려온 황해도 사람은 100만명이 넘는다. 가장 많이 정착한 곳은 인천이다. 석전경우(石田耕牛), 돌밭을 가는 소처럼 억척스러움으로 한 때 인천의 정치, 경제는 물론 문화 분야까지 황해도 출신이 다수 차지했다. "인천이 황해도 인천시냐"라는 불만이 나올 정도였다. 1960년대 말 선친은 송현동에서 작은 연탄공장을 창업했다. 공장 건물에 '황해연탄'이란 간판을 매달았다. 석탄을 운반하는 사람, 연탄을 찍어내는 사람, 달구지로 배달하는 사람, 경리 보는 사람 등 일꾼 모두를 고향 사람으로 채웠다. 늘 검댕이 칠을 한 고향 아저씨들의 맨 얼굴은 명절을 맞아 우리 집에 올 때나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서구 검단에 황해도민 공동묘지가 있다. 고향을 찾아가는 날 길동무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황해도 출신들이 함께 잠들어 있다. 빈털터리로 사선(死線)을 넘어와 인천에서 모질게 살아 온 그들의 삶은 저마다 다큐멘터리 한 편씩이다. 그게 모이면 인천 역사의 한 줄기가 된다. 인천 근대 역사에는 개항장과 관련한 '최초 최고'만 있는 게 아니다. 지금이라도 모아야 한다. 생존자의 구술은 그 어떤 자료보다 값지다. 새해부터 지역의 한 신문이 '실향민 이야기'를 기획시리즈로 다루고 있다.

이참에 관련 기관과 연구 단체에서 이 일에 힘을 보탰으면 하는 바람이다. 부모님은 생전에 자식들이 어리석은 행동을 할 때마다 "맹쪽 같은 짓"이라며 꾸짖으셨다. '맹쪽'은 황해도 사투리다. 요즘으로 말하면 '뻘짓'이다. 인천이 피난민 1세대의 삶을 조명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맹쪽 같은 일이지도 모른다.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