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이들 중엔 훗날 사형(死刑) 당하는 아이가 있을 지도 모른다….”
 어느 초등학교 교정에서 나는 그렇게 중얼거린 적이 있다.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 그 빨강 노랑 초록 신호등 모양의 벤치에 앉아 그런 생각이나 하다니…. 끔찍한 일 아닌가. 그 아이가 자기 아이라면, 아니 그 아이가 언젠가 자기가 가르쳤던 그 귀여운 제자라면….
 그 어느 운동회날, 아름다운 시소, 아름다운 정글짐, 아름다운 온갖 새, 그리고 아름다운 아이들과 아름다운 선생님들을 바라보며 나는 곧 그렇게 중얼거렸던 말을 겨우(?) 취소할 수 있었다. “꽃중에도 싸리꽃 단물이 나고/ 비중에도 싸리비 일도 잘하네/ 정답고 부지런한 축현 어린이/ 싸리 싸리 싸리재/ 만세 만만세….” 내가 다니던 그 축현초등학교의 교가를 속으로 크게(?) 부르며 말이다.
 학교는 아름답다. 아니 학교는 아름다워야 한다. 나는 아직도 나 다니던 그 아름다운 초등학교 교정, 그 아름다운 벤치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꿈을 자주 꾸곤 한다. 비 오는 어느 가을의 저녁, 그 아름다운 벤치에 앉아 한 아름다운 소녀를 끌어안고 울먹이는 그런 슬픈(?) 꿈을 가끔 꾸기도 하는 것이다. 소녀는 `아니마""(anima), 그러니까 `부드러움""에 대한 `진정한 내적 자아""(true inner self)의 한 표상이다. 학교는 언제나 그렇듯 아름다운 부드러움의 원형상징으로 우리의 무의식 속에 영원히 잠재해 있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무엇이 그 아이를 사형에 처해지도록 인도(?)하는가. 그 아이의 공범(共犯)은 누구란 말인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창세기 1장)고 했는데, 과연 보시기에, 그리고 우리가 보기에 좋은가. 그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이 세상, 그 `질서 잡힌 우주""를 나타내는 영어의 `코스모스""(cosmos)는 그리스어의 `코스미오스""(kosmios)에서 온 말로 `아름답다""는 뜻을 갖고 있다. 아름답게 하는 것, 그것이 소위 신이라는 존재의 뜻이며 그 현현(顯現)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우주라는 인식은 그 신의 뜻만큼이나 아름답지 않은가. 스승은 그렇게 그 제자에게 어떤 아름다운 `질서""를 부여하는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승은 그 제자를 창조하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동양의 위대한 스승 그 공자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군자는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도록 돕지만 그 징그러움을 이루도록 돕지는 않는데, 소인은 그 반대다”(子曰 君子 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反是―論語, 顔淵篇) 그렇다면 공자가 말하는 그 군자는 스승일 것이며 스승은 곧 그렇게 남의 아름다움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군자일 것이다. 스승만큼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도록 돕는 자가 또 있을 수 있을까. 위대한 스승은 그 제자들에게서 배운다. 그러한 스승과 제자가 있을 때 그 학교는 아름다운 학교이다.
 스승의 날이다. 선생과 제자가 아닌 그저 교사와 학생, 그렇게 사무적이고 행정적인 어떤 관계가 되어버린 교육의 현실을 그냥 되돌아 본다. 스승은 보기에 좋아야 한다. 그리고 청출어람(靑出於藍), 그 스승이 가르치는 제자는 보기에 더 좋아야 한다. 이 아름다운 스승의 날 아침, 그 육체와 영혼이 다 보기에 좋은 그러한 스승과 제자, 그렇게 피차 `아름다움을 이루도록 끊임없이 돕는"" 진정한 의미의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 그러한 `사랑""을 주고 받는 아름다운 대도량(大道場)을 나는 한 번 꿈꾸어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