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사 이전' 구월동 자리잡기까지 굴곡진 역사
'1985년 중구 관동서 옮겨 … 식당 등 없어 주변 '허허벌판'
'붉은고개마을' 주민 보상 2000년까지 당국과 치열 다툼'
▲ 1990년대 초반의 구월동 붉은고개마을. 1985년 인천시청사가 들어서면서 철거되기 시작해 2000년 까지 보상 문제로 투쟁하면서 일부가 끝까지 남아 있었다.

최근 인천시의 신청사 건립 용역과 맞물려 청사 이전 문제가 불거져 나오고 있다. 현재의 구월동 시청사는 1985년 중구 관동에서 이전했다.

현재 중구청사로 사용하고 있는 옛 시청사는 인구 6만8000명이었던 시절(1932년 8월) 일제가 인구 10만명을 포용하기 위한 시세에 맞춰 건립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듬해 5월 연건평 1451㎡ 지하 1층, 지상 2층 콘크리트 건물로 지었다.

그곳에 터를 잡은 것은 배후가 산(응봉산)으로 싸여 있고 전면은 바다가 내려다 보여 풍수지리로 볼 때 당시 인천 제일의 명소였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광복 후 인천시는 그 건물을 그대로 사용했고 64년 인구 50만 명 증가 추세에 맞춰 본관 한 층을 증축했다.
68년 1월 구제(區制) 실시 이후 급격한 인구 증가와 80년대 인구 100만명에 맞춰 75년 별관을 준공하는 등 공간을 넓혀왔다.

그러나 81년 7월1일 직할시로 승격(인구 114만)되면서 본청 기구가 증가함에 따라 3층 옥상에 가건물 까지 올렸지만 그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다.

이즈음 청사 이전 논의가 시작되었다. 당시 안찬희 인천시장은 제 20회 시민의 날(84년 7월1일) 기념사를 통해 시청사 이전에 대해 언급했다.

"인구의 격증 현상에 따른 새로운 민원 행정 수요에 대비한 각종 행정제도의 개선과 행정전산화를 위한 전산실 운영, 봉사행정 능률제고를 위한 새로운 시청사의 신축 등 명실상부한 임해공업도시, 관광위락도시, 국제항구문화교육도시로 발전하기 위한 직할시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있도록 기반구축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전 장소는 '구월 신시가지'라고 불렀던 구월지구였다.

이 지역은 1980년대 들어 도시계획 확장에 따라 구획정리사업이 진행되던 곳으로 농장과 과수원 등이 있는 한적한 교외지역이었다.

신청사는 83년 9월28일에 착공하여 2년 1개월만인 85년 10월29일에 준공했고 12월 9일 업무를 시작했다.

부대시설로 테니스코트 4면, 배구코트 2면, 잔디축구장 등 당시 행정기관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제대로 된 스포츠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시공업체는 한보건설이었다. 1997년 IMF 금융위기를 일으키게 한 장본인 중의 하나로 꼽히는 이 그룹은 결국 해체되었지만 한 때 재계순위 14위로 인천시청을 시공할 때가 전성기라고 볼 수 있다.

시청사 내 녹화 작업과 청사 주위 미관 작업은 시민들이 헌수한 각종 나무를 활용했다. 170명이 348그루를 기증했는데 그중 수령 1백년이 넘는 사철나무가 포함돼 화제가 되었다.

도화초등학교 초대교장을 지낸 정진종 옹이 가꾸던 높이 5m 직경 7m의 나무로 50톤 대형 크레인과 10명의 인부를 동원해 6시간 이상 작업 끝에 옮겨 심었다.

시청이 들어섰을 때 주변은 온통 허허벌판이었다. 밤이 되면 한줄기 불빛 조차 보기 힘든 지역이었다.

당시 지역신문은 사설을 통해 '시청건물만 서있고 식당이나 다방, 대서소 등 각종 보조기능을 담당하는 업소들이 없어 시청을 찾는 시민들이 당분간 불편을 감당해야 할 것'을 우려했다.

시청 이전은 부동산 투기를 불러 일으켰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동서인 금진호 상공부장관은 재직 중이던 83년 7월 구월동 토지 653㎡를 매입했다.

2년 뒤인 85년 12월 시청사가 금 장관이 소유한 땅(지금의 길병원사거리 부근)과 불과 3백여m 떨어진 곳으로 이전함으로써 땅 값이 급등했다.

구월동 일대가 행정 중심지로 된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해 토지를 매입했다는 의혹으로 인해 한동안 여론이 들끓기도 했다.

시청 주변에는 '붉은고개마을'이 있었다. 70년대 중구 북성동 등 시내에서 개발에 밀려온 사람들이 몰려와 살았다. 자고 나면 흙벽돌집이 몇 채 씩 새로 생기면서 거대한 무허가 빈민촌을 형성했다.

시청이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그들은 다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붉은 고개 주민들은 2000년까지 보상 문제를 놓고 당국과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외지인들은 골목에 들어가기 조차 힘들만큼 분위기가 살벌했다.

다소 섬뜩한 마을 이름도 한 몫했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붉은 고개 자리가 지금의 시교육청 옆 중앙공원 부근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는 그 흔적이 다 사라졌고 구월 3동에 '붉은고개공원'라는 이름만 남겼다.  /유동현 인천시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