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이영태의 한시로 읽는 인천 옛모습 (50)
물류창고 無 '항구기능 부족'… 지게꾼·조수간만의 차 묘사

1883년 인천 항구를 열었다. 철저히 준비한 상태에서 개항한 게 아니었기에 인천은 항구로서 온전히 기능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교통과 물류의 저장 및 배송 시설을 구축하는 데에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埠頭 부두
 路上葺蓬儘積儲(노상즙봉진적저) 길가에는 띠풀로 지붕을 이은 집들이 줄지어 있어,
 望之累累似蝸廬(망지누누사와려) 멀리서 바라보니 연달아 있어 달팽이집과 같구나.
 市無倉廩何迂拙(시무창름하우졸) 저자거리에는 창고가 없으니 어찌 이리 서투른가,
 猶是當年開港初(유시당년개항초) 이것이 개항(開港) 초의 모습이다.

 
또 말하길, 탄식할 만하다(同曰 可嘆).
 
개항한 지 10년이 지난 1893년 인천 제물포 부두의 모습이다. 부두를 따라 늘어선 집들은 '띠풀로 지붕을 이은 집'들이었고, 멀리서 바라보면 달팽이집들이 이어진 모습이라 한다. 특히 물류의 저장 및 배송에 필요한 창고가 없었다는 지적이 이채롭다. 그래서 마쓰모도의 단평도 '탄식할 만하다'고 부기했던 것이다.

이후 본격적인 창고 영업은 1905년에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가 인천출장소를 열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물론 1918년 10월 갑문과 독(Dock)이 완성되어 출입선박이 증가함에 따라 창고 영업이 활황을 이루었다.
 
 擔軍[韓音智計勳擔夫也(한음지계훈담부야)] 담군[조선말로 지계훈이니 짐꾼이다.]
 一架負來雙木枝(일가부래쌍목지) 한 개의 작대기와 두 개의 나무 가지를 지고 오니,
 白衣塵垢滿踈髭(백의진구만소자) 흰 옷은 더럽고 얼굴엔 성긴 수염이 가득하다.
 匹如羣狗飢求食(필여군구기구식) 굶주린 여러 개들이 먹이를 앞에 놓은 것과 같으니,
 正是千夫爭擔時(정시천부쟁담시) 바로 여러 사내들이 짐을 다투는 때이다.

 
부두 지게꾼의 모습을 그려내는 데에서 조선인을 대하는 일본인의 시선을 읽어낼 수 있다. 전환국의 기술자였던 작자는 지게꾼을 '근대'와 동떨어진 것으로 여겼다. 근대의 기술문명에 기대지 않고 '한 개의 작대기와 두 개의 나뭇가지'로 만든 지게는 열악한 운반도구로 보였다.

게다가 '흰 옷은 더럽고 얼굴엔 성긴 수염이 가득'하다며 지게꾼의 모습을 운운하고 있다. 전환국 기술자가 보기에 부두 지게꾼은 근대의 위생개념과 거리를 두고 있는 짐꾼의 모습이었다. 물론 지게에다 짐을 실으려고 짐꾼들이 서로 다투는 것을 '굶주린 여러 개들이 먹이를 앞에 놓은 것과 같'다는 지적에서도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 기술자의 시선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海門落潮 해문낙조
 人自洋心步往還(인자양심보왕환) 사람들이 바다 가운데로 들어갔다 돌아오고,
 膠沙巨舶幾灣灣(교사거박기만만) 개흙 모래에 거대한 배가 몇 척 정박해 있구나.
 舟師只待潮生處(주사지대조생처) 뱃사공은 다만 조수가 밀려들기 기다리고,
 一樣揚帆一瞬間(일양양범일순간) 같은 모양의 돛을 펼치기는 한 순간이다.

 
또 말하길, 조수(潮水)의 높이가 30척이니, 평평한 모래사장이 몇 리나 되다가 갑자기 물결이 해안에 부딪친다. 이것이 이 항구의 한 가지 기이한 광경이다(同曰 潮高三十尺 忽而平沙數里 忽而波浪嚙岸 是此港一奇觀矣).
 
갑문 시설이 등장하기 전, 해관에서 바라본 낙조의 모습이다. '개흙 모래에 거대한 배가 몇 척 정박해' 있기에 '뱃사공은 다만 조수가 밀려들기 기다'려야 할 처지이다. 인천항이 배의 입출항이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마쓰모도가 단평을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시의 제목은 '해관에서 바라본 서해의 낙조(海門落潮)'인데, 낙조에 대한 진술은 없고 갯벌에 정박한 배의 모습만 나타나 있다. 작자나 그의 동료 마쓰모도에게 인천의 조수간만의 차가 '기이한 광경(奇觀)'이었던 것이다.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이사


인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한시로 읽는 인천 옛모습'은 이번 50회로 끝을 맺습니다. 그간 애독해 주신 많은 독자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