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강덕우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48> 근대 기상 관측의 출발
▲ 인천기상대.

지금도 경험으로 축적한 일기변화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기후를 예측하는 방법이 있다. 하늘의 색과 구름의 모양 및 움직임 등을 관측해 날씨를 예측하는데, 저녁노을은 맑을 징조이고 해무리·달무리가 지거나 산에 갓모양의 구름이 걸치면 비가 올 징후이며 또 연기가 위로 솟아 올라가면 맑을 징후라는 등이 그런 유형이다. 농촌이나 어촌에서는 이러한 관천망기법(觀天望氣法)이 행해지고 있었고 전근대 농경사회에서는 자연재해의 예방을 위해 천문과 기상 관측은 국가 최대의 관심사였다.

해관(海關)에서의 기상 관측

기온, 기압, 강수량 등 기상 요소를 종합적으로 관측하는 근대 기상관측은 1883년 인천의 개항과 함께 시작됐다. 1876년 부산의 개항 이래 통관 물품에 대한 관세의 부과 없이 7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낸 조선은 관세의 중요성과 가치를 깨닫게 됨에 따라 1883년 6월16일 최초로 인천해관을 창설하게 됐다.

당시 해관 총세무사는 독일인 묄렌도르프였고 해관 종사원 또한 모두 외국인이었는데, 인천 앞바다의 선박 계류시설이 불편했던 당시 본선(本船)으로부터 화물이나 인원을 안전하게 수송하기 위한 수단으로 현장의 기상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9월1일부터 정규적인 해양 기상관측이 시작됐고 다음해 1월1일부터는 인천해관에서 종합적인 연안 기상관측이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기상관측은 매일 3회 해관원들에 의해 관측됐는데, 기존 관상감에서 행하는 전통적인 자료와는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기상관측이 이뤄졌다. 1884년 2월15일 일본의 나가사끼에서 부산간 해저전선이 연결돼 부산에 일본전신분국이 문을 열면서 동경기상대는 대한해협의 폭풍경보를 위해 부산의 기상자료가 절실히 필요해서 일본전신분국 직원에 의한 위탁 기상관측도 시작됐다.

인천 기상대의 출발

1904년 2월9일 일본과 러시아와의 전투가 소월미도 앞에서 발발함에 따라 러일전쟁이 전개됐고, 일본해군은 이미 1904년 2월15일 한반도의 남서안 외곽 목포 근해에 위치한 팔구포(八口浦)에 러시아 군함을 감시하기 위한 망루(望樓)를 건설했다.

그리고 2월23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가 강제 체결됨에 따라 일본은 한국 내에서 군사상 필요한 곳을 수용할 수 있게 됐다. 4월3일 백령도에 감시 망루를 세워 해상감시와 기상관측업무를 강화하는 것과 같은 시기에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체계적인 기상관측을 위해 3월7일 부산에 제1임시관측소, 3월26일 목포 팔구포에 제2임시관측소, 4월6일 인천 제물포에 제3임시관측소, 5월10일 용암포에 제4임시관측소, 4월10일 원산에 제5임시관측소를 설치했다. 일본군은 전쟁에 필요한 고급정보로 한반도와 만주지방의 기상관측과 예보도 필요했던 것으로 이로부터 날씨 예보와 폭풍우 경보를 할 수 있게 됐다.

제물포 제3임시관측소는 초기 일본거류지 제41호, 현 중구청 뒤쪽 송학동의 스이쯔(水津)여관을 차용해 관측업무를 시작했는데, 1905년 1월1일 응봉산 정상에 신축 청사가 완료되자 이전했으며 1907년 4월1일을 기해 기존의 임시관측소들은 인천의 통감부 관측소와 그 산하의 측후소로 개편됐다.

908년 4월1일부터는 대한제국 농상공부관측소로, 1910년 10월 1일에는 조선총독부 통신국 소속의 조선총독부 관측소가 됐다. 인천은 조선에서 신식 기상관측의 중심지로 주목받았던 것이다.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시보(時報) 역시 1906년 2월9일부터 시작됐는데, 이날은 일본이 제물포해전에서 승리한 후 제정한 '인천시민의 날'이기도 했다.

관측소 남쪽 언덕에 구식 대포를 설치하고 공포(空砲)를 쏘아 인천 사람들에게 정오(正午)를 알렸는데, 매일 낮 12시 정각이면 한방씩 공포를 쏘았던 탓에 관측소가 있던 응봉산은 '오포산(午砲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기상대 정원에서 쏘아졌던 오포는 1931년 7월1일 홍예문 위 인천상비소방소 감시탑에서 사이렌으로 대체되기 까지 계속됐다.

천문관측 시대로의 진입

1929년 1월 인천 기상대 청사가 새롭게 준공되고, 3월에는 천문관측을 위해 직경 5m 정도의 크기를 가진 돔 형태의 적도의실(赤道儀室)의 낙성식을 갖게 됐다. 그리고 9월 천문관측을 위해 직경 15㎝, 초점거리 225㎝인 천체망원경을 설치했다.

배율은 321배, 250배, 180배, 125배, 90배, 56배 등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망원경에 의한 천문관측의 시작이었다.

1939년 7월 코펜하겐 천문대 천문전보중앙국으로부터 신혜성 '리골레트혜성'을 발견했음을 동경천문대로 타전했는데, 이어 인천에 있는 조선총독부 기상대에 타전된 내용에 '혜성'에 대한 관측 자료가 나타나고 있다. 인천의 기상대는 명실상부한 기상관측의 선구지로서 국제적으로 상호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1939년 7월1일 조선총독부 관측소는 조선총독부 기상대로 개칭됐다. 중·일 전쟁 발발 이후 기상업무는 전시체제 정책의 하나였기 때문에 전국의 측후소가 정부 관할로 이관돼야 한다고 제안됐기 때문이다. 기상대는 1939년 7월2일 인천에 설치됐으며, 기존의 인천측후소의 시설을 승계해 운영됐다.

광복 후 인천기상대는 몇 차례의 변화를 겪게 되는데 1945년 10월 군정청 학무국 산하의 중앙관상대, 1949년 8월 국립중앙관상대가 됐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의 최종 목표지점이었던 기상대는 상륙작전 과정에서의 포화(砲火)로 신관(新館)만 남게 되고, 구관(舊館)이라는 별칭을 가졌던 본관과 적도의실(赤道儀室) 및 많은 문헌들이 없어지게 됐다. 그리고 1953년 11월 국립중앙관상대가 서울로 이전됨에 따라 인천측후소가 됐으며 1992년 3월 대전지방기상청 인천기상대로 개칭됐다.

2010년 천안함 폭침사건 당시 침몰 사고 시각인 3월26일 오후 9시22분45초에서 9시24분 사이에 인천기상대 지진계는 평소 유입되는 노이즈(잡음)의 배 정도 규모인 수중음파가 기록되고 있었다.

백령도 근해 사고해역으로부터 180㎞ 떨어진 인천에서 '인공 지진'을 감지했다는 것은 그만큼 인천기상대의 역할이 아직도 남다르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