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일보 연중기획] 권시, 문학사 벽에 걸린 송강의 시문 읽고 '탄옹집'에 차운시 남겨
[인천일보 연중기획] 권시, 문학사 벽에 걸린 송강의 시문 읽고 '탄옹집'에 차운시 남겨
  • 김진국
  • 승인 2015.07.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천 정체성 찾기] 이영태의 한시로 읽는 인천 옛모습
47)문학산(文鶴山)에 있던 문학사(文鶴寺)
▲ '탄옹집(炭翁集)'.
 
문학산(文鶴山)은 인천 남구를 대표하는 산이다. '문학'이란 명칭은 산의 모습이 학(鶴)이 날개를 펴고 앉은 모습[鶴山]이며 근처에 향교와 서원처럼 글[文]과 관련된 공간이란 데에서 유래한다. 문학산의 주봉(224m) 정상부에는 문학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동사강목(東史綱目)��과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고구려 동명왕의 둘째아들 비류(沸流)의 도읍지로서 석성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문학산에는 학림사(鶴林寺), 연경사(衍慶寺), 문학사(文鶴寺) 등의 사찰이 있었다.

권시(權諰, 1604~1672)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 ��탄옹집(炭翁集)��이라는 문집을 남겼다. 인천과 관련하여 <문학봉에 오르다(登文鶴峯)>, <능허대에서 놀다(遊凌虛臺)>, <능허대(凌虛臺)> 등의 시문이 있다.
 
 虜在頻看劍(노재빈간검) 오랑캐 생각하며 칼을 자주 쳐다보고
 人亡欲斷琴(인망욕단금) 벗들이 죽었으니 거문고 줄 끊고 싶네
 平生出師表(평생출사표) 평생 출사표를 읽었건만
 臨亂更長吟(임란경장음) 난리를 만나 다시 길게 읊조리네

 
문학사(文鶴寺)의 벽에 걸려 있는 사운시(四韻詩)이다. 이에 대해 권시는 '송강이 강화에 있었는데 조중봉이 전사했다는 것을 듣고 지었다(或云是松江詩 在江華 聞趙重峯戰死作)'고 설명하고 있다. 조중봉(趙重峯)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조헌(趙憲, 1544~1592)이다.

조헌이 금산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은 오랑캐에 대한 분노와 지기(知己)를 잃은 슬픔, 그리고 국가 장래에 대한 걱정을 시문에 남기고 있다. 칼을 쳐다보면서 오랑캐를 생각하고 친구를 잃은 슬픔으로 거문고 줄을 끊고 싶었다. 그리고 출사표를 다시금 꺼내 길게 읊고 싶을 정도로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였다.

벽에 걸려 있는 송강의 시문을 읽고 권시는 다음처럼 차운하였다.
 
 儒術平生業(유술평생업) 유학을 평생의 업으로 삼으니
 居然錦繡心(거연금수심) 어느덧 비단결 같은 마음이네
 聵聰皆有耳(외총개유이) 못 듣거나 잘 듣는 것 귀에 달려 있고
 眞濫少知音(진람소지음) 알아주는 사람 별로 없어도 참으로 과분하네
 俎豆干將劍(조두간장검) 제사 그릇과 간장검(干將劍)으로 남아
 兵戈帝舜琴(병과제순금) 전쟁터의 임금 목소리 들리네
 工詩乘壯語(공시승장어) 장쾌한 단어에 기대 시를 지어
 但供後人吟(단공후인음) 다만 후인들 읊도록 바치네

 
유학을 평생의 업으로 삼아왔던 작자에게 임진년의 국란에 대처했던 선배들은 존경스런 대상이었다. 전란에 임하던 그들에 비해 자신은 시문에 표현한 대로 '알아주는 사람 별로 없'는 자이지만, 그것조차 과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제사 그릇으로 남은 선배들의 죽음 앞에서 그들이 전장에서 휘둘렀던 칼은 간장(干將)이 만든 명검(名劍)과 다름 아니었다.

순 임금의 거문고[帝舜琴]는 순(舜)이 오현금(五絃琴)을 타면서 〈남풍가(南風歌)〉를 부른 일을 가리키거나 단순히 임금의 목소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남풍가(南風歌)〉의 노래말이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의 성냄을 풀 만하네. 남풍이 때 맞춰 불어옴이여, 우리 백성 재물이 넉넉하리라(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처럼 태평함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선배들이 전장에 나선 것은 이러한 임금의 목소리를 위한 일이었다. '제사 그릇과 간장검(干將劍)으로 남'은 선배들을 생각할 때, 작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장쾌한 단어에 기대 시를 지어 다만 후인들 읊도록 바치'는 일뿐이었다.

권시는 문학산의 문학사의 벽면에 걸린 시를 발견하고 거기에 차운하였다. 작자는 '송강이 강화에 있었는데 조중봉이 전사했다는 것을 듣고 지었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다른 기록에 따르면 송강이 임진년에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의 명을 받고 바닷길로 장연(長淵)을 거쳐 가다가 금사사(金沙寺)에 머물렀는데, 이때 의병장 태헌(苔軒)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시문이라 한다.

어쨌건 문학사의 벽면에 송강의 시문이 있었고, 그에 대한 차운시가 ��탄옹집(炭翁集)��에 남았던 것이다.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이사

▲ 인천일보, INCHEONILBO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