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일보 연중기획] 인천, 일·중·영·러 이권쟁탈 기지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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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진국
  • 승인 2015.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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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정체성 찾기] 강옥엽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47) 국제도시 인천 - 개항기 인천의 영사관

1883년 인천 개항과 더불어 개항장에는 외국인의 거류지와 일본, 중국, 영국, 러시아 등의 영사관이 설치됐다. 영사관 업무는 제일 중요한 게 자국민 보호였고, 인천에 거주하는 자국민의 보호를 위한 건축물 외에도 경찰서, 우체국, 전보소, 형무소 등을 설치해 우리나라 진출의 교두보로 활용했다. 당시 이들의 활동과 관련해 '제물포 정략'이라는 표현이 생길만큼 인천은 정치 1번지로 부각됐다.

근대 개항장 인천

1875년 운요호사건으로 일본에 의해 강제됐던 강화도조약의 결과, 1883년 인천 제물포가 개항됐고, 중국은 물론, 서구의 여러 나라들과도 조약을 체결하면서 통상을 계기로 외국인들이 인천항에 밀려들었다.

개항장에는 외국인들의 출입국에 따른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기관인 해관과 감리서가 설치되고, 일본, 청국 및 각국의 조계지가 조성되면서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각국의 영사관이 설치됐다. 각국 거류지를 중심으로 상공업시설과 종교·교육·문화시설들도 빠르게 설립되면서 통상과 관련된 중요한 일들이 인천에서 벌어지게 됐다.

외국에 파견되는 외교사절들은 대개 대사나 공사, 그리고 영사의 직함을 띠게 된다. 파견될 외교사절의 계급은 당사국간의 합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외교적으로 밀접한 이해관계가 있는 국가 간에는 '대사'를, 작은 나라나 외교관계가 밀접하지 않은 국가는 '공사'를 파견하는 것이 보통이다.

영사는 외국에 있으면서 외무부장관과 대사나 공사의 지시를 받아 자국의 무역통상이익을 도모하고 주재국에 있는 자국민을 보호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하는 공무원이다. 본국에서 파견되는 영사와 그 나라의 거주자 가운데 무보수로 선임하는 명예영사의 두 가지가 있는데 상공업의 진흥과 자국민의 항행(航行)업무를 통괄하고, 접수국의 상공업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 본국에 보고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인천에 세워진 각국 영사관

개항 후 인천에 영사관을 세운 나라는 일본, 청국, 영국, 러시아 등이었는데, 최초로 영사관을 개설한 것은 일본이었다. 인천항이 개항되기 전인 1882년 인천개항준비위원회를 만들고 미리 개항장 일대에 진출하면서, 지금의 개항박물관 자리에 임시 영사관을 두고, 현재의 중구청 자리에 영사관 신축을 준비했다. 당시 일본은 원산, 인천, 부산, 서울에 영사관을 개설했다.

인천의 일본영사관은 지금의 중구청 자리에 위치했고 2층의 목조건물로 1884년 준공됐는데, 같은 해에 준공된 부산영사관과 매우 흡사한 형태의 서양식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1906년에는 이사청으로 사용됐고, 1910년 이후에는 인천부청으로, 그리고 새로운 인천부 청사를 짓기 위해 1932년 헐고 1933년 신축했다. 광복 후에는 인천시청으로 사용되다가 현재 중구청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2006년 등록문화재가 됐다.

청국영사관은 1884년 10월 세워졌는데 1907년까지 영사를 이사 또는 이사관이라 불렀다.

청일전쟁기간(1894~1895)에 직원들이 모두 철수해 임시 폐쇄됐다가 1898년부터 다시 개관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전보국을 설치했는데, 청나라의 기술에 의해 본국과의 빠른 정보교환을 위해 마련됐다.

청국영사관은 출입문이 보이는 사진 자료만 남아있어 건축가들에 의하면, 중국 전통양식과 서양건축의 영향을 받은 이중구조로 구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청국영사관이 있던 곳은 현재 인천화교학교가 들어서 있고, 1910년 건립한 영사관 회의청이 그 옆에 남아 있다.

영국영사관도 1884년 지금의 항동 파라다이스호텔 자리에 설치돼 1897년 신축됐는데, 그 자리는 원래 외국 선박의 출입상황을 알리는 봉화대가 있었던 곳이다. 영국의 경우, 인천에 거주하는 상인은 적었지만 조선에 대한 관심에서 초기 이화양행이나 홈링거양행, 광창양행 등 상사 진출과 존스톤별장으로 알려졌던 영국인 존스톤 등의 존재로 볼 때 당시 영사관이 담당했던 경제적 역할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영국영사관 건물은 1915년 폐쇄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1931년 5월까지는 영국계 광창양행의 베네트가 자신의 주택으로 사용하면서 영사직을 맡았던 기록이 있다. 광복 후인 1946년 시립미술관으로 활용하려는 계획이 있었는데 6·25전쟁으로 결국 소진됐다.

러시아영사관은 당초 경성에 있었는데, 1902년 10월 서울에 있던 부영사관이 인천에 이설된 것이다. 인천에 기항하는 동청(東淸)철도주식회사 소속 기선관련 사무를 취급하기 위해서 옮겼는데, 인천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목적이었다.

러시아는 인천 각국 공동조계의 조약체결권자도 아니었고 조계 내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없었기 때문에, 각국공동조계를 관리하는 '신동공사(紳董公司)'의 의원은 되지 못했다. 따라서 서울의 부영사관을 인천으로 이설한 것은 신동공사 의원의 자격을 얻어 자신들의 이익을 확대하려는 목적이었다.

처음에는 성미카엘 부속병원의 빈 가옥에서 개관했다가 후에 선린동에 청사를 신축하고 이전했는데 러일전쟁의 패배로 영사가 귀국하면서 영사관도 폐쇄됐다. 러시아영사관 건물은 영사업무가 종료된 후 관사는 체신국인천출장소, 인천해사출장소 등으로 사용되다가 1974년 철거됐다.

미국과 독일도 당초에는 영사관을 건립할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미국은 지금의 자유공원 언덕 청일조계경계계단 근처에, 독일은 존스톤 별장이 있었던 한미수교100주년 탑 인근에 부지를 매입했던 기록만 남아있다.

특히, 미국의 경우는 영사관 부지로 매입한 곳을 해관 사택부지로 되팔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최근 그 자리가 바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던 지점으로 확인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부지만 확보하고 설립은 하지 않았는데, 미국은 공사가 중앙정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독일은 묄렌도르프가 조선의 재정고문으로 있었기에 굳이 인천에 영사관을 건립하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130년 전 국제도시의 경험

개항장에 외국인들의 거류지가 조성되고 각국이 영사관을 두었던 것은 통상이라는 명목이지만 결국은 이권쟁탈이었다. 조선에서의 철도부설권, 광산채굴권, 연안해운권 등 각종 이권을 두고 각국 공사와 영사의 로비가 대단했을 것은 자명하다.

상가나 기관의 건물이 견고하고 화려하게 지어지는 것도 이러한 결과의 하나였고 서로간의 정보교환이라든가 친목을 위해 제물포구락부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공사 알렌의 개입으로 모스가 철도부설권이나 운산광산채굴권을, 데쉴러가 하와이 이민을 주도 할 수 있었다든가, 타운센드가 왕실관련 사치품과 전기관련 용품 등을 납품하고, 왕궁 전등시설 공사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 등이다.

과거 준비되지 못한 개항과 세계정세에 어두웠던 현실에서의 갈등과 시행착오적인 경험들은 오늘날 송도, 영종, 청라 등의 조성을 통해 국제도시로 비상하는 인천으로서는 특히, 2015년 '인천 가치 재창조'를 지향하는 입장에서는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교훈이라 할 것이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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