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속 등불처럼 등장 지역 정통지 맥 잇고 정론지로 거듭


"우~우웅~"

1988년 7월15일 인천시 중구 항동 인천신문(현 인천일보) 윤전실. 문병하 사장을 비롯해 오광철 주필, 오종원 편집국장이 긴장어린 눈으로 윤전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윤전실 밖에서도 사람들이 내 고장 신문의 고고한 첫 울음을 기다리며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이었다.

"우~우~우~웅~ 촤르르륵!" "와-아!"

윤전기가 마침내 신문을 토해내자 신문사 안팎에서 함성이 터져나왔다. 15년 만에 다시만난 가족처럼 사람들은 서로 끌어안고 기뻐했다. 쓰윽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는 사람의 모습도 보였다. 사람들은 16면짜리 신문을 부둥켜안고 울고 웃으며 내고장 신문의 부활을 축하했다.


"등불, 전깃불은커녕 촛불 하나 없던 암흑의 세계에 등불이 환하게 밝혀졌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인천의 원로언론인 김상봉 선생은 "인천일보의 창간은 단순한 또하나의 지역언론의 탄생이 아니라 인천에 연고를 둔 대중일보의 부활이자, 경기매일신문의 부활이었다"며 "인천사람 모두가 드디어 내 고장 신문을 다시 찾게됐다며 펄쩍펄쩍 뛰었다"고 회고했다.

인천일보의 창간을 놓고 인천사람들은 '인천의 정체성'의 부활로 간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천일보가 탄생하기 전까지 인천은 내고장 언론을 갖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1973년 8월31일 인천의 대표적 언론이었던 경기매일신문이 지령 9018호를 끝으로 역사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이때 '1도1사'란 언론탄압 정책으로 인천의 양대 일간지였던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일보'를 수원의 연합신문에 강제로 통폐합시킨다. 인천의 언론인 상당수가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1973년 8월 31일은 인천사람들에게 한이 맺히고 치욕적인 날이었던 것이다. 당시 인천에선 경기신문 불매운동까지 일어났었다.

그러던 인천에 언론자율화와 함께 내고장 신문, 경기매일신문, 대중일보의 후신 인천일보가 부활했으니 인천사람들로선 죽은 자식이 살아 돌아온 셈이었던 것이다.
 
'애향심 제고, 공동체 구축, 독자성 창출, 공정성 견지'의 인천일보 창간과 굴곡의 세월

1988년 여름 인천일보는 '애향심 제고, 공동체 구축, 독자성 창출, 공정성 견지'라는 4개항의 사시(社是)를 내걸고 지역언론의 대장정을 시작한다. 이후 27주년을 맞은 오늘까지 인천일보는 단절된 지역정통지의 맥을 잇기 위한 변화와 적응의 시간을 이어왔다.

군사정권,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전국민의 6.10항쟁으로 6.29선언이 발표되고 정부는 대통령직선제와 언론자율화를 약속한다. 이때 경인일보 소속 인천의 주주 53%가 빠져나와 인천일보 창간을 주도한다. 그렇게 1988년 대표이사 문병하, 총무국장(후에 상무) 김진모, 주필 편집인 오광철, 편집국장 오종원 체제로 출범한다. 1990년 2월 제2대 편집국장에 김창수씨가 선임되며 1년 7개월 뒤 이재호 국장이 바통을 이어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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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엔 신문 제호를 '인천일보'로 바꾸었는데 이는 '신문'이란 제호가 주간지의 인상을 준다는 여론 때문이었다. 1993년엔 신문제작 방식의 현대화를 시작한다. 그동안 활자식으로 만들었던 방식을 전산식(CTS)으로 전화한 것이다. 이때 조직도 1실5국18개 부서에서 2실5국16개 부서로 개편한다. 그 해 7월 16일 대표이사 사장에 오광철씨가 취임하며 김정기 상무, 최용표 편집국장 체제로 전환한다.

1994년 3월 문병하 대표이사는 회장으로 물러나고 장재춘씨가 신임사장을 맡게 된다. 이중흡 전무, 이성주 편집국장 체제에서 인천일보는 인천·경기도를 대표하는 대표 일간지로 거듭난다. 같은 해 7월15일엔 6층짜리 신사옥으로 이전하고 같은 해 12월 미국 고스(GOSS)사로부터 새 윤전기를 도입한다.

4면 컬러에 24면을 인쇄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최신형 고속 윤전기였다. 이어 1997년엔 화상과 기사집배신 시설을 구축하며 신문 제작 전산화 시스템을 완성한다. 회사 대표도 유덕택(1998) 사장, 신화수사장(2000), 황호수(2003) 대표이사 직무대행, 박세호(2005) 대표이사 직무대행, 장사인(2006) 사장, 김정섭(2007)사장에 이어 황보은, 정홍 대표이사로 체제가 바뀌면서 지금까지 왔다.

특히 현재 회장을 맡고 있는 김정섭 회장은 인천일보가 매우 어려운 시기 회사경영을 떠맡아 위기를 극복했다. 여기에 현 박길상 대표이사 역시 3년 전, 고사 직전의 인천일보 대표이사로 취임한 이래 지난 3년간 법정관리체제를 잘 끌어와 조만간 졸업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지역의 평가를 얻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 27년 과정이 결코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급변하는 미디어시장에 따른 종이신문의 쇠락, 경영난으로 인한 노사갈등으로 인해 엄청난 아픔을 겪었던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창간 27주년을 맞은 인천일보는 지금 다시금 인천 경기도를 대표하는 신문, 동북아의 대표신문으로 부활하는 중이다.
 
인천일보의 현재와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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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일보는 지금 박길상 대표체제로 과거 인천시민 경기도민의 사랑을 되찾아오기 위해 임직원이 혼연일체로 노력 중이다. 3년 전 법정관리에 들어간 이후 임직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올해 졸업을 앞두고 있으며 이는 정상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천일보는 올해만도 한국기자협회가 주는 '이 달의 기자상'을 연거푸 2차례나 수상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인천일보는 현재 지방자치제의 성공적 정착과 서울의 그늘에서 벗어나 동북아 중심도시로 발전하는 일에 목표를 두고 정론직필에 매달리고 있다. 지역민의 삶의 질 제고와 알권리 보장, 다양한 관심사 충족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이제는 지역의 뉴스를 더욱더 소중히 여기고 샅샅이 찾아가는 '지역적 특수성'을 강화하는 한편 거시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적 보편성'도 추구하며 지역밀착형 언론만들기를 견지하는 중이다.

이를 위하여 인천일보 임직원들은 젊고 건강한 신문, 어른을 모시는 신문, 내고장의 권익을 위해 뛰는 신문을 지향하며 '공기(公器)'의 역할을 다하겠다는 각오와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한껏 성숙된 청년으로 새로워지고 전문화된 책임 있는 정론지가 될 것을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중요한 것이 바로 지역민의 애정 어린 관심과 지원이다. '인천일보의 힘'은 바로 독자들로부터 나온다. 유수의 외국 지역신문들이 전국지보다 더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것도 지역민들이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각별한 사랑을 쏟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제 역할도 못하면서 지역이라는 당위성을 내세워 지역신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역민의 애정을 요구하는 것은 언감생심일 것이다. 인천일보는 앞으로 '독자 제일주의'를 앞세워 우리 지역의 여론을 적극 반영해 지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지역민은 지역신문의 역량강화를 지원하고, 다시 이를 활용해 지역발전을 견인하는 발전적인 선순환 구조를 만들 때 신문도 살고 지역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입지(30)'의 나이를 앞두고 있는 인천일보는 동북아의 대표도시 인천, 우리나라 경제의 중심지 경기도와 손잡고 함께 성장하는 '인천시민·경기도민이 가장 사랑하는 신문''동북아의 대표신문'이 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나가는 중이다.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