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일보 연중기획] (46) 배다리, 동구의 길목
[인천일보 연중기획] (46) 배다리, 동구의 길목
  • 김진국
  • 승인 2015.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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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후 교통요지·공업지로 발전
[인천 정체성 찾기] 강덕우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 경인선 창영동 건널목(1967년).

중구 경동에서 경인전철 다리 아래를 지나 동구 금창동 초입에 이르면 중앙시장 앞에 '배다리'가 있다. 현재의 금창동과 송림동 일대인데 동구 화수동 괭이부리에서 수문통을 거쳐 지금의 송림초등학교 앞까지 흘러오는 커다란 갯골이 있었고, 밀물 때면 이곳을 따라 인천 앞바다의 바닷물이 밀려 들어왔기 때문에 이곳을 지나가기 위해서는 '배를 댈 수 있는' 다리가 놓여 있어야만 했다.

경공업 지역으로의 변화

내동에서 싸리재(축현)를 거치면 배다리가 나오고 이어 쇠뿔고개(우각현)에 이르는데 이 길이 바로 서울로 진입하는 경인가도(京仁街道)의 옛 길이다.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에 "이 길은 사람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호젓하여 대낮에도 살인강도가 출몰했고, 사형수의 형장이었다"고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인천 개항 이전에는 인적이 드문 한적한 지역이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1883년 인천이 개항한 이래 일본조계, 1884년 청국조계 및 각국조계가 형성되면서 이 곳 배다리 일대는 조선인 주거지로 진입하는 초입이면서 '번창하는 인천'의 변두리에 해당했다. 그러나 청일전쟁 개전 직후인 1894년 8월20일 <조일잠정합동조관>이 체결되면서 경인철도 부설이 확정지어지자, 이곳은 교통의 요충지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1895년 내리교회 담임목사인 존스가 우각리(현 금창동)의 땅 3400평(1만1220㎡)을 매입해 교회당을 건축하게 된 이래 1897년 우각현(쇠뿔고개)에서 경인철도 기공식이 있었다.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 조계지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주변 지역으로의 전입이 불가피해짐에 따라 인근 땅값이 폭등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 지역은 새롭게 주목받는 지역이 될 수밖에 없는 입지적 조건을 가지게 됐다. 이 언덕길 옆 소나무로 덮힌 넓은 산을 독점하고 있는 알렌별장이 들어서게 되는 것도 이러한 추세를 반영한 결과였던 것이다.

1899년 경인철도의 우각리역이 만들어지자 이 지역은 교통의 요지로 발전하면서 이 지역에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1906년 송림리에 설립된 노다(野田)간장회사였다. 이 공장에서는 용표, 다카스키 간장부의 고표가 생산됐는데, 같이 생산되는 호마레 된장 역시 그 품질과 풍미에 있어 모두 일본 1등품을 능가해 중국 만주 방면으로도 수출됐다.

또한 금곡리에 1917년 조선인촌주식회사가 설립돼 사업이 신의주에까지 진출했는데, 근로자가 400여 명 정도였고, 제품의 안전성이 커짐에 따라 조선 내 수요를 상당수 충족시키고 있었다.

더구나 성냥제조 사업 자체가 본래 수공업이므로 비교적 많은 남녀직공을 필요로 하는 것 이외에도, 작은 상자를 만들기 위해 조선인에게 원료를 공급·제작했는데 이를 부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500여 호에 이를 정도로 조선 유일의 근대식 설비를 갖춘 성냥공장이었다.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우각리 도정공장과 양조장, 송림리의 햄공장과 양조장 등이 들어서면서 수도권으로 생활필수품을 공급하는 경공업지역으로 탈바꿈하게 됐다. 인천부의 외곽이었던 이 지역이 새로운 공업지대로 발돋움하면서 이방인들에 의해 크게 주목받게 됐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외국인 지주, 조선인 노동자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1910~1918년 <토지조사부>를 보면 대략적으로 금곡리의 지적(地積) 4만2000평 중 일본인 히라야마(平山松太朗) 등이 1만2000평, 중국인 왕효당(王孝棠) 등이 3700평, 영국인 베넷과 미국인 타운센트 등이 1만8000평 등 외국인이 3만3000평을 차지하고 있었고, 우각리 역시 지적 3만평 중 일본인 미야시게(宮重要吉) 등이 3500평, 중국인 오명당(吳明堂) 등이 3000평, 영국인 베넷과 미국인 타운센드 등이 1만2500평 등 1만9000평을 소유하고 있어 소수의 외국인들이 이 일대 토지의 절반 이상을 소유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지역은 소수의 이방인이 대다수의 토지를 점유하는 속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대거 운집해 있던 형태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15년 매일신보 2월14일자에는 인천의 회일(晦日, 그믐날)이라는 제호 아래 '배다리시장(우각리시장)'이라는 기사가 나오는데, "가서 시찰하여 본 즉 어쩌면 그 같이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들었는지 한번 들어갔다가 나오기도 매우 곤란할 뿐만 아니라 평시에는 나무바리나 혹 왕래하던 우각동 마루터기에서부터 삼마장 거리나 되는 배다리까지 각 촌의 어른 아이들은 물론하고 행인이 연락부절하였는데 빈손으로 가는 자는 하나도 볼 수 없고 모두 손에 주렁주렁 이것저것 들고 가는 자도 있고 짐을 가진 자도 있으며 소에 잔뜩 실은 자도 있어 방끗방끗 웃으며 부리나케 나가는 모양이다"라고 묘사하고 있어, 이 시기 우각리와 금곡리, 송림리의 초입에 해당하는 배다리는 사람이 모이는 중심지로 기능했음을 알 수 있다.

새로운 물결

1919년 3·1운동이 발발 후, 인천에서는 3월6일부터 시위운동이 전개되고 이어 동맹 휴교와 상가(商街)가 철시됐는데 그 역사적인 장소가 바로 배다리지역이었다. 그리고 1920년대부터 인천의 기간산업이라 할 수 있는 정미소, 성냥공장 및 부두 노동자들의 노동쟁의가 끊임없이 시작됐다. 일제 강점기하의 한국 노동운동은 농촌 과잉인구의 끊임없는 증가, 대량실업의 존재, 가계보조적인 부녀자 및 소년노동의 존재, 민족차별적 노동정책 등으로 인해 장시간 저임금 노동력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비록 경제적 빈곤문제 해결이 시급한 과제였지만, 그것이 경제력을 독점하고 있는 일본인과의 투쟁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 시기의 노동운동은 자본가와의 대결 뿐 아니라 일제와의 대결이라는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났다.

배다리는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고, 인천 사람들이 모여드는 터전이었다. 비록 대다수의 토지가 이방인에 의해 점유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가 있었지만, 그 모순도 극복해 가려했던 개척지였고 선구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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