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일보 연중기획] 열강들과 조약 체결 … 연구 지속돼야
[인천일보 연중기획] 열강들과 조약 체결 … 연구 지속돼야
  • 김진국
  • 승인 201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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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정체성 찾기] 강옥엽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43> 근대의 접경, 인천에서의 조약
▲ 청국조계 위쪽에 세무사 공관이라는 표시가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대조선인천제물포각국조계지도'(1884) [김성수 제공 자료 재인용]

19세기 제국주의세력은 중국, 일본에 이어 조선에까지 진출했고 일본과의 운양호사건(1875)으로 1883년 인천이 개항됐다.

인천항의 각국인들은 보다 유리한 조건에서의 교역과 이권사업을 점유하기 위해 각축했고 정치적 이해관계와 더불어 강화도조약, 조미수호통상조약, 제물포조약 등 많은 조약이 인천에서 체결됨으로써 인천은 자의든 타의든 근대 문화를 수용해야 했던 접경이자 선구지 공간으로 자리했다.

각국과의 조약 체결

1876년 조선은 '강화도조약'을 통해 일본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이것이 근대조약의 시초였다. 일본과 수교 후,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쟁탈에 위기의식을 느낀 조선정부는 일본을 견제하고자 하는 청국의 조언을 받아들여 구미열강과 수교할 것을 결정했다.

뒤이어 청국의 리훙장이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할 목적으로 미국과의 수교를 알선함에 따라 수교논의가 진전돼 1882년 3월25일 조약체결을 위해 슈펠트 제독이 인천에 도착했다.

조선은 신헌을 전권대신으로 임명하고 김홍집을 부관, 서상우를 종사관으로 임명해 미국 측과 협상한 후 제물포에서 4월6일(양력 5.22)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 역시 서구 열강과 맺은 최초의 조약이었고, 이후 구미 열강들과 조약체결의 근거가 됐다.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은 강화도 연무당에서 체결됐다. 그리고 미국과의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이어서 영국(양력 6.6), 독일(양력 6.30) 등과 조약을 체결하는데, 그 체결 장소가 모두 제물포였다.

또, 일본과 임오군란(1882)의 배상문제로 그야말로 제물포에서 '제물포조약'을 체결했다. 이들 조약은 조미수호통상조약과 큰 차이가 없었고 내용을 보면 모두 불평등조약이었다.

이밖에도 1882년 중국과의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비롯해서 1884년 이탈리아와 러시아, 1886년 프랑스, 1892년 오스트리아, 1901년 벨기에, 1902년 덴마크 등과도 차례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결국, 을사늑약 바로 전인 1904년 12월 외교관, 영사관제가 폐지되면서 각국 주재공사의 철수명령이 내려지고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하게 됐다.

조약의 주요 사항

전문 14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은 서구와 맺은 조약의 단초가 됐는데, 일본 및 청국과의 조약보다는 그 정도가 완화되기는 했지만 치외법권과 최혜국대우를 보장하는 불평등조약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치외법권과 최혜국대우를 보장하는 것이 주요 쟁점이었다.

사실 영국은 조약 체결 이후에도 아편의 수입금지와 최고 3할에 이르는 고율의 관세부과에 대한 불만 때문에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고, 독일 정부에도 비준을 거부하도록 종용했다. 영국의 경우, 결국 재협상을 통해 10월27일에 수정·조인했다.

수정된 조영조약에서 협정관세와 치외법권, 최혜국 대우와 연안무역권, 연안해운권 등을 인정함으로써 조선시장은 외국상인에게 완전히 개방됐다.

이렇게 개정된 조영수호통상조약은 조독수호통상조약과 이후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등을 비롯한 유럽 열강과의 조약체결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됐고, 이후 한국의 관세수입에 계산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엄청난 손실을 안겨준 계기가 되고 말았다.

조약 체결의 장소

그동안 인천지역사회에서는 특히,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 장소에 대해서 몇 가지 이견(異見)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국사교과서에서는 '인천 제물포'에서 체결됐다고만 명시돼 있었는데, 1959년경 인천의 한 향토사가가 개항기 선교사들이 만든 최초의 영문잡지인 (1897.10) 및 (1901.1)에 게재된 내리교회 존스목사의 글을 토대로 '화도진'으로 구체화했다.

그 이후 최근까지 화도진으로 알려져 있었다. 2000년 무렵에 신학을 연구하는 인천 연구자가 앞서의 자료에서 영문해석이 잘못됐음을 지적하고, 화도진이 아닌 지금의 파라다이스 호텔 아래 초기 '해관' 근처에 천막을 치고 조약을 체결한 것이라는 또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조약체결 장소에 대한 실마리는 '해관 관리관의 사택'이 과연 어디에 있었던가 하는 것이었는데, 이미 같은 책에 아펜젤러목사가 서술한 '슈펠트의 회고'라는 글 가운데 해관 관리관 사택 부근에서 천막을 치고 체결했다고 언급되고 있으며, 그 장소는 처음에 미국이 영사관부지로 선정했다가 해관에 양도했던 곳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이를 보다 정확하게 확인해 줄 수 있는 사진이나 지도 같은 시각적인 자료가 필요하던 차에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찐이 설계한 '대조선인천제물포각국조계지도'(1884)가 2013년 세관에 근무하는 연구자에 의해 발견되면서 확인이 가능하게 됐다(이러한 사실은 이미 인천일보 2013.9.23.(월) 및 2014.5.22.(목)일자에 보도됐다).

이 자료를 통해 해관 관리관의 사택은 자유공원 청일조계경계계단 위쪽, 현재 음식점이 있는 자리임을 확인 할 수 있다. 그 위치는 1962년경에는 선교방송인 극동방송(HLKX)의 스튜디오가 있었던 자리이기도 하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은 그 언덕 인근에 천막을 치고 체결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1882년 일본과의 '제물포조약' 체결 장소인데, 현재 인천개항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과 대불호텔 터 일대이다. 그러므로 당시 조미조약에 이어 제물포조약, 영국, 독일과의 조약도 전혀 다른 장소가 아니라 지금의 자유공원으로 가는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 부근에 천막을 치고 맺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역사적 사실 정립과 가치 재창조

인천은 과거 자의든 타의든 근대 개항과 더불어 각국과의 조약을 체결했던 중요 공간이었고, 이를 통해 근대 문화가 이입된 지도 어언 130년이 지났다. 지난날의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국제도시로 나아가는 인천의 문화콘텐츠를 구성하는 바탕이 되고, 또, 미래를 향한 방향제시가 될 것이다. 올바른 역사적 사실 정립이 곧 인천 가치 재창조이고 동시에 인천 지역사 연구가 지속돼야 할 의미이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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