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일보 연중기획] '최초·최다 생산지' 역사속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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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진국
  • 승인 2015.06.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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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정체성 찾기] 강덕우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42> 태양과 바다물의 조화, 인천의 천일염전
▲ 인천의 염전.

소금은 인간생활에 필수적인 식품으로 고대국가의 종교의식에서 중요한 제물로 이용됐고, 로마시대에는 군인의 급료이기도 했다. 봉급받는 직장인을 일컫는 'salary man'의 어원이 소금인 salt에서 유래된 것을 보면 소금의 사회경제사적인 의미가 컸음을 알 수가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금은 국가재정의 주요 수입원으로 인식됐기 때문에 대다수 국가들이 재정 확보를 위해 독점적인 전매제도를 채택한 이유가 됐다.

전통적 소금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소금은 해수(海水)를 끓여서 만든 자염(煮鹽)으로 화염(火鹽), 전오염(煎熬鹽), 육염(陸鹽)이라고도 했다.

소금을 생산하던 염장(鹽場)은 바다와 인접한 갯벌에서 농도가 짙은 소금물을 쉽게 만들 수 있어야 했고 조성된 짠물을 솥에 넣고 달여서 제염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땔감이 우선적으로 고려됐다.

반면 자염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몇 일 동안 쉬지 않고 끓여야 하는 속성으로 인해 연료비나 인건비 등의 경비가 과다하게 지출됐다.

개항 이후 인구가 증가하고,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소금의 수요가 증가해 갔고, 그에 따라 제염지도 확대돼 갔다. 특히 소금에 절인 어물(魚物)의 소비가 증가해 외국산 소금도 유입되고 있었다.

일본상인이 일본 소금을 처음으로 수입한 시기는 1885년으로 이후 1890년대 말까지 일본 소금의 수입량은 증가했지만, 조선인은 조선 소금의 소비에 익숙해 있었고 외국 제품에 대한 반감을 지니고 있어 수입된 일본염의 판매는 순조롭지 못했다.

청국산 소금은 1898년을 기점으로 수입되고 1903년 이후 본격적으로 확대 보급됐는데 이로부터 국내 제염업자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청국의 소금은 천일염이고 일본염과 조선염은 자염이었기 때문에 조선 소금의 반액 정도의 싼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그러나 청국의 천일염은 비록 가격은 저렴했다 하더라도 제염 기술수준이 낮았고 소금발이 굵어 식용으로 쓰기가 어려웠으며 검은 빛깔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자염과 비슷하게 가공하지 않고는 조선인에게 판매할 수 없었다.

인천에서는 이를 다시 제조하는 재제염(再製鹽)이 크게 부흥했는데, 재제염은 입자가 큰 청국 소금을 다시 녹여 깨끗하고 입자가 모래처럼 고운 백색 소금을 만들어 내는 작업이었다. 처음에는 판매가 부진했으나 일상적인 식생활에 뿌리를 내리면서 1908년부터 인천에 재제염 공장이 들어서게 됐다.

한편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을 치르면서 대규모의 군사비용과 재정지출이 커지자 식민지에서도 마찬가지로 전매제도를 강화시켜 재원확보에 주력했지만, 당시 청에서 밀려오는 값싼 천일염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조선 내에 천일염전을 구축해 관염(官鹽)으로 생산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대책이라 판단했다.

조선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압도적인 생산량을 보여주는 천일염전을 대대적으로 개발하고 이를 전매체제로 통제해 엄청난 수입을 올리려 했던 것이다. 게다가 갯벌의 땅은 임자가 없었기 때문에 마음먹은 대로 천일염전을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초의 천일염전

1907년 일본 대장성의 조사와 자문에 기초해 인천의 주안면 십정리에 중국인 기술자를 고용해 최초로 시험용 염전 1정보를 축조했는데, 중국이나 대만보다 양호한 천일염이 생산됨에 따라 이를 토대로 1909년부터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게 됐다.

한국 최초의 천일염이 생산된 것으로 인천은 지형·기후·토질 면에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고, 거대한 배후 시장이 있어 경인철도를 통해 신속한 물류가 가능한 최적의 입지 조건이었다. 또한 항구를 통해 일본으로의 반출을 손쉽게 하려는 목적도 내포돼 있었다.

주안염전은 지금의 서구 가좌동과 십정동 일대의 지역으로, 이 염전의 성공적 사례를 계기로 이후 인천 일대의 염전은 제1기(1907~1914) 99정보(주안), 제2기(1919~1920) 139정보(주안), 제3기(1921~1924) 875정보(남동, 군자), 제4기(1934~1945) 549정보(소래) 등으로 급속히 증대하고 있었다(1정보(町步)는 3000평으로 약 9917.4㎡에 해당한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인구의 소금 소비량이나 인천 등 어항에서의 소금 소비량의 증가도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1921년 7월 담배와 소금은 국가의 전매품이 됐고, 1933년경 인천의 염전은 전국 소금 생산량의 절반인 15만t을 생산해 내고 있었다.

인천 염전의 성쇠

주안역(驛)은 주안염전이 조성된 이후에 설립됐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어쨌든 대규모 염전에서 생산된 소금은 서울과 인천뿐만 아니라 중부내륙지방으로도 공급됐다. 그 결과 경인철도를 경계로 그 북쪽지역은 소금밭으로 완전히 전용됐고, 주안역에 잇닿아 소금생산 노동자와 관리인들의 기거를 위한 일본식 목조 주택들이 줄지어 입지했다.

대략 주안역과 경인철도를 사이에 두고 그 북쪽의 염전지대와 남쪽의 농업지대로 지역기능이 특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37년 개통한 수원~인천간의 수인선 열차는 소금을 많이 실어 날라 흔히 '소금 열차'로 불렸다. 본래 소금을 수송하기 위해 건설된 수인선은 1931년 개통한 수여선(수원~여주 간 74.3㎞)과 맞닿아 있어 임금님 수라상에 올랐다는 여주이천 쌀의 수송도 맡았는데, 남동염전의 남쪽 해안을 매립하고 소래에 철교를 놓아 만든 것으로, 처음부터 열차가 남동, 소래, 군자염전을 거쳐 가게 설계됐고, 실제로 이들 지역의 소금을 실어 날랐던 것이다.

인천의 소금은 경인선과 수인선 그리고 경부선·경의선 등으로 연계해 국내는 물론 일본과 만주까지 소금이 실려 나가게 됐던 것이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소금의 과잉생산으로 말미암아 소금 값이 폭락하자 염전업자들은 적자운영에 시달려야 했고, 1961년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정부가 앞장서서 폐염을 권장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1968년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염전이었던 주안염전이 폐염돼 산업단지로 조성되더니 남동염전 마저도 1980년대 인천시의 새로운 도시개발 계획에 밀려 산업단지가 조성됐다. 거기에 1995년 수인선이 폐선되면서 소래염전마저 폐염전이 됐다.

인천 소금의 역사는 이제 옛 이야기가 됐고, '소래습지생태공원'를 통해 그때 그 영화를 기억해야 하는 현실이 됐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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