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일보 연중기획] 대몽항쟁 ~ 6·25전쟁 숱한 국난 극복
[인천일보 연중기획] 대몽항쟁 ~ 6·25전쟁 숱한 국난 극복
  • 김진국
  • 승인 2015.06.04 23:44
  • 수정 2015.06.04 20: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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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정체성 찾기] 강옥엽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41> 호국의 공간 인천
▲ 도화동에 있었던 국군묘지.

6월은 흔히 '호국보훈의 달'이라고 한다. 2015년 제60회 현충일을 앞두고 있다. 인천은 2030년이 넘는 오랜 역사의 과정에서 숱한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고 오늘날의 인천광역시로 거듭 태어나기까지 그 어느 도시보다 지정학적으로 선조들의 희생이 담보됐던 공간이었다.

동시에 전근대시기 이민족의 침입은 물론, 근대의 길목에서 마주친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사건, 청일·러일전쟁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등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먼저 국가를 수호해야 했던 호국의 현장이기도 했다.

▲호국과 현충

인천의 역사적 역할 중에는 '호국의 공간'이었던 특징이 있다. 고려 후기 몽골과의 전쟁 와중에 강화도가 제2의 수도로서 역할도 했지만, 40여년간 항몽의 근거지였던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또, 조선시대 강화도는 수도를 방위하는 '왕실의 보장처'로 혹은 서해안지역을 포괄하는 '전략적 방어진지'로 기능하였다.

이렇게 나라를 수호했던 역사적 흔적은 강화도만이 아니라 문학산성, 월미돈대, 화도진, 계양산성, 중심성, 연희진, 논현포대 등 인천지역 곳곳에 남아있다. 인천이 6·25전쟁 당시 상륙작전의 현장이 됐던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1948년 8월 정부수립 후 2년도 채 못 되어 6·25전쟁을 맞았고 40만명 이상의 국군이 사망했다. 정부는 1956년 4월 대통령령으로 매년 6월6일을 현충일로 지정해 공휴일로 정하고 기념행사를 갖고 있다. 현충일의 추모 대상은 순국선열과 전몰장병인데, 제정 당시에는 6·25전쟁 전사자에 한정됐다가, 1965년 국군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되면서부터 순국선열을 함께 추모하게 됐다.

▲현충일의 의미

현충일(顯忠日)은 말 그대로 국토방위에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충성을 기념하는 날이다. 오늘날과 같은 국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간 수많은 전란을 거쳤고, 각 국가마다 그 전란에서 희생된 자를 추모하는 행사를 하고 있다.

6월6일은 24절기 중 아홉 번째인 망종(芒種)에 해당하는 날인데 우리 선조들은 24절기중 손이 없다는 청명일과 한식일에는 사초와 성묘를 하고 망종에는 제사를 지내왔다. 농경사회에서는 보리가 익고 새롭게 모내기가 시작되는 이 날을 가장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1956년 현충일 제정 당시 정부가 6월6일을 현충일로 정했다.

외국의 예를 보면, 미국에서는 5월 마지막 월요일을 '메모리얼 데이(Memorial Day)'로 정해 전몰자를 추도하는 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무덤에 꽃을 장식한다는 뜻에서 '데코레이션 데이(Decoration Day)'로도 불린다.

미국은 남북전쟁(1861~1865)과 관련되어 1868년 5월30일에 북군 출신의 존 로건 장군이 전사한 북군 장병 무덤에 꽃을 장식하라고 포고령을 내린 데서 비롯됐다고 하는데, 남북전쟁에서 해방된 흑인 노예들이 1865년 5월1일 해방을 자축하고 북군 전사자들의 죽음을 애도한 것이 기원이란 이야기도 있다.

영국의 경우는 1차 세계대전 종전일인 11월11일과 가까운 일요일을 현충일인 '리멤버런스 데이(Remembrance Day)'로 기린다. 캐나다·호주 같은 영연방 국가들도 대부분 11월11일을 현충일로 기념하고 있다.

독일은 프러시아왕국이 여러 기독교 교파의 전몰자 추모일을 하나로 통합한 데서 비롯됐는데, 예수 재림절 이전 둘째 일요일에 전몰자를 기린다. 일본도 1963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8월15일을 종전기념일로 정해 행사를 진행했는데 뒤이어 '전몰자를 추도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날'로 정의하고 있다.

인천의 현충시설

처음에 인천 수복의 감격과 조국을 지키고 겨레를 구하기 위해 생명을 바친 국군의 혼을 기리기 위해 1953년 6월9일 자유공원에 충혼탑(忠魂塔)을 세웠다. 그런데 1957년 바로 동쪽 정면에 서게 된 맥아더 장군의 동상에 비해 초라하다는 의견이 있어서 재건 계획이 논의됐다.

그러던 중 1972년 6·25전쟁 중 사망한 전몰장병 379위의 영령을 기리기 위해 현충탑을 수봉산 정상부에 이전 건립하게 됐다. 당시 국군묘지는 1958년 옛 선인체육관 자리에 설치돼 있었는데, 1968년 서울의 국립묘지로 이장될 때까지 매년 현충일에 추념식이 열렸다.

1976년 현충탑 보수를 계기로 탑 광장 등에 조경 및 편의시설을 설치하면서 오늘의 수봉공원이 조성됐는데 여기에는 참전기념탑, 전적비 등과 전쟁으로 인한 망향의 한을 달래기 위한 망배단 등이 있다. 이러한 연원이 수봉공원에서 현충 행사를 진행하는 이유이다.

국가보훈처의 조사에 따르면 6·25전쟁과 관련해서 전국에 652여개의 현충시설이 있다. 그중 인천지역은 16개 정도가 위치하고 있다. 수봉공원의 현충탑 이외에도 자유공원에 맥아더 장군 동상과 인천학도의용대 호국기념탑, 연수구에 인천상륙작전 기념관, 부평구에 부평전투승전기념비, 서구에 콜롬비아군 참전기념비 등이 있다.

그리고 강화군에 현충탑, 송해면에 강화특공대 의적불망비와 반공 유격용사 위령탑, 교동면에 유격군 충혼전적비 등이 있고 옹진군 연평면에 무명6용사 충혼탑, 백령면에 반공유격전적비, 덕적면에 충혼탑, 영흥면에 해군 영흥도 전적비 등이 있다.

특이한 것은 전국 각 지역에 6·25전쟁때 참전했던 각 나라들의 참전비를 세웠는데 인천은 서구 가정동에 콜롬비아군 참전 기념비를 마련했다. 서구 가정동 콜롬비아공원 내 마련된 콜롬비아군 참전 기념비는 6·25전쟁 당시 UN군의 일원으로 중남미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참전했던 콜롬비아군을 기념하고자 1975년 9월24일 세워진 것이다.

콜롬비아군은 연인원 5100명이 참전해 금성 진격전투, 김화 400고지 전투, 180고지 연천전투, 234고지 철원전투 등을 치렀는데, 군율이 엄하고 용맹하기로 소문났으며 '절대 후퇴하지 않는다'는 특유의 모토를 지켜 매 전투마다 혁혁한 전과를 세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국의 공간, 인천의 가치

중요한 것은 이 시대 우리에게 오랜 세월 선열들이 목숨을 바쳐 지켜낸 이 공간을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 것인가 하는 공동의 과제가 있다. 현재 해결해야 할 정치·사회적 문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인천 역사를 통해 무엇보다 어려운 시기 호국의 자세로 미래를 개척해 갔던 선조들의 삶과 시대정신을 되새겨보는 것도 인천만의 가치 재창조의 한 방법일 것이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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