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계양을 떠나는 이규보와 그것을 막아서는 사람들
▲ '고을을 떠나면서 시를 지어 전송객에게 보이다(發州有作 示餞客)'

이규보에게 계양 생활 13개월은 선정(善政)을 펴기에 짧은 기간이었다. 선정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등장하지 않지만, 관료로서 계양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제시하는 시문 <태수가 부로에게 보이다(太守示父老)>와 <우연히 읊어 관료에게 보이다(偶吟示官寮)>가 전할 뿐이다. 그리고 3편의 기우제문에 애민(愛民)으로 읽어낼 수 있는 구절들도 있다.

하지만 기거주(起居注)의 직함으로 부름을 받고, 서울로 향할 때의 모습을 담고 있는 시문을 통해 이규보와 계양 사람들 간의 정리(情理)를 짐작할 수 있다.

 
 <고을을 떠나면서 시를 지어 전송객에게 보이다(發州有作 示餞客)>

 
 太守初來時(태수초래시) 태수가 처음 올 때
 父老夾道邊(부로협도변) 부로들이 도로를 메웠고
 其間婦與女(기간부여녀) 그들 사이로 부녀자들도
 騈首窺蘺偏(병수규리편) 머리 나란히 하여 울타리에서 엿보았네
 非欲苟觀貌(비욕구관모) 내 모습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庶幾沐恩憐(서기목은련) 은혜를 얻고자 원함이었지
 到郡若酷暴(도군약혹폭) 이 고을 와서 만약 혹독히 했다면
 其眼願洗湔(기안원세전) 그 눈을 씻고자 했을 텐데
 我今理無狀(아금리무상) 내 생각건대 아무 일도 한 것 없어
 欲去畏懷甎(욕거외회전) 떠나려 하니 벽돌을 품었다[瓦全]는 생각에 두렵기만 하네
 胡爲尙遮擁(호위상차옹) 어찌하여 길을 가로 막아서나
 似欲臥轍前(사욕와철전) 가는 수레 앞에 누우려는 듯하네
 好去莫遠來(호거막원래) 잘 갈 테니 멀리 따라오지 마라
 我行疾奔川(아행질분천) 내 행차는 내닫는 냇물처럼 빠르네
 爾邑誠困我(이읍성곤아) 너의 고을이 나를 괴롭게 하여
 二年如百年(이년여백년) 두 해가 백 년 같기만 하네


 
위의 시문을 통해 이규보가 계양으로 부임할 때의 모습과 그곳을 떠날 때의 광경을 상상할 수 있다. 서울에서 태수가 새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계양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길가에 서 있는 노인들과 울타리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부녀자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부임하는 태수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부임 행렬은 흔한 광경이 아니었기에 계양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될 만했다. 이에 대해 이규보는 낯선 광경을 보려는 목적이 아니라 선정을 베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어냈다.

다행히도 작자는 부임 행렬에서 느꼈던 계양 사람들의 기대감 어린 시선을 떠나는 행렬에도 여전히 감지할 수 있었다. 만약 자신이 계양 사람들에게 혹독하게 했다면, 계양 사람들이 과거에 보냈던 눈빛이 사라졌을 것이라는 진술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작자는 계양 생활 13개월을 회고하며 '아무 일도 한 것 없(我今理無狀)'다고 한다. 작자는 '벽돌을 품은 일[懷甎]' 혹은 '기와를 온전히 품은 일(瓦全)'에 대해 두렵다고 한다. 선정을 베풀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하고 그에 따른 시행착오도 겪으며 그것을 바로 잡아가는 게 태수의 책무일 텐데, 자신은 '아무 일도 한 것 없'기에 벽돌이나 기와를 품었다고 표현했던 것이다.

하지만 계양주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수례 앞에 누우려는 듯[臥轍, 와철] 서울을 향하는 이규보의 행렬을 막아섰다. 와철(臥轍)은 와철반거(臥轍攀車)의 준말이다. 와철반거(臥轍攀車)는 《후한서(後漢書)》의 후패열전(侯霸列傳)에 전하는데, 선정(善政)을 베푼 지방 관원이 다른 곳에 가지 못하도록 그 지방의 주민들이 수레를 붙잡기도 하고 수레바퀴 앞에 누워서 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이별을 아쉬워하는 계양 사람들을 다독였지만 그들은 멀리까지 따라올 태세였다. 계양에서 그들과 함께 했던 정리(情理)를 생각해 보니 그들의 행동도 크게 나무랄 수 없었다. 작자가 그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는 것이었다. '너의 고을이 나를 괴롭게 하여, 두 해가 백 년 같기만 하다'가 그것이다. 13개월을 100년으로 여길 정도로 계양 생활이 괴로웠다는 것인데, 이는 계양 생활에 대한 이규보의 반어적(反語的) 표현이었다.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