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일보 연중기획] 연평도 조기·굴업도 민어 시장 형성
▲ 1967년 연평파시.
▲ 1964년 화수부두 조기건조장
파시(波市)는 바다위에서 성어기(盛漁期)에 각처에서 모여드는 어민들로 형성되는 계절적인 어시장을 말한다. 옛날에는 파시평(波市坪)이라고도 했고 현재에는 연안의 육지시장 일대를 합친 어촌취락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어족은 해류를 따라 회유(回遊)하므로 거의 정해진 어기(漁期)에 정해진 어장에서 잡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어장(漁場)이 달라짐에 따라 어선·어업 관계자, 접객업자, 기타 상인들이 후조(候鳥)처럼 이동했고, 어기가 지나면 다시 한적한 어촌으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연평도의 조기(助氣)파시
인천의 파시로는 단연 연평도였다. 인천으로부터 뱃길로 127㎞ 떨어져 쾌속선으로 2시간 가량 소요되는 위치에 있는 이 섬은 전라도의 칠산어장, 평안도의 용암어장과 더불어 조기의 3대어장이었는데, '석수어의 왕국', '전 조선의 찬장', '서조선의 대보고'라는 찬사를 받으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조기(助氣)는 기운을 돕는다는 뜻으로 일명 석수어(石首魚)라 한다. 이것은 조기의 머리 속에 돌 같은 것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조기는 해주 남쪽 연평에서 나며 봄이 여름으로 바뀌는 계절에 각 처의 어선들이 이 곳으로 모여든다. 관에서는 그 어선에 세금을 물려 나라의 재산으로 쓴다"고 돼 있어 국가에 바치는 주된 공물(貢物) 중의 하나로 이미 주목받아 왔음을 알 수 있다.

연평도는 조기들의 산란을 위한 최적의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어기(漁期)는 4~6월로 그 동안의 연평 바다는 물 반 조기 반인 황금어장으로 변했다. 연평도에 파시가 서면 연평도의 해안선은 모두 조기저장 탱크였고, 조기를 엮어 쌓아 놓은 굴비가 산더미 같았다. 연평도의 조기는 진남포, 서울의 마포, 인천 등지에서 판매됐는데, 파시가 되면 인천의 모든 어촌 또한 조기를 말리는 대형 건조대였다. 인천의 굴비가 '영광의 굴비'보다 씨알이 굵고 알도 더 차있기 때문에 오히려 최상품으로 평가받았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인천 호족 이자겸의 굴비(屈非)와 임경업의 조기낚시
고려시대 인종은 '이자겸 난'의 주인공이었던 장인을 차마 죽일 수 없어서 외딴 곳 전라도 영광으로 유배시켰는데, 이자겸은 유배 중에도 조기를 간해서 물기를 뺀 후 말린 조기를 엮어 '굴비(屈非)'라 이름 붙여 왕에게 진상했다. 비록 유배를 당했지만 내 뜻을 '굴복하지는 않는다'는 뜻이 '굴비'에 담겨 있었던 것으로, 한편으로는 고려시대부터 조기가 요리로서 정착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다.

임경업 장군은 고기잡이 신, 어업 수호신으로 평안도 철산 앞 바다에서 전남 흑산도에 이르는 곳곳에서 풍어제에 등장하고 있다. 임경업 장군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명나라로 가던 중 연평도를 지날 때 병사들이 굶주리고 지쳐서 더 이상 나갈 수가 없게 되자 가시나무를 그물처럼 엮어서 조기를 잡아 먹였다는 민담은, 연평도가 '고기 반, 물 반'이라 하던 한국의 대표적인 조기 어장임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 이후로 뱃사람들은 그를 어업의 신으로 받들어 왔으며 연평도에 임경업 장군의 시호를 따서 충민사(忠愍祠)라는 사당을 짓고 해마다 조기철에 풍어를 기원하는 풍어제를 올렸다.

굴업도와 덕적도의 민어(民魚)파시
백성 민(民)자를 쓸 정도로 예로부터 백성의 사랑을 받아온 물고기 민어. 우리나라에서 대규모 민어어장이 발견된 것은 1906년의 일로, 이후 1920년 굴업도 인근의 장봉수도(長峯水道)에서 민어어장이 발견되면서 전국 각처의 어선이 굴업도로 몰려들었다. 무인도와 다름없었던 이 섬이 1923년에는 조선인 120호(477명), 일본인 6호(17명), 중국인 2호(3명)가 거주하는 바다위의 도시로 변모했고, 7~9월까지 성어기에 민어를 잡으러 오는 어선만도 500여척이 넘었다. 그러나 1923년 8월 서해를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태풍은 가장 먼저 굴업도를 강타했는데 정박해 있던 선박은 물론 섬 내의 130여 가옥도 무너트려 버렸다. 태풍으로 인해 굴업도의 어업시설이 궤멸돼 버렸고 피난항으로서 덕적도의 북리항(北里港)이 1924년부터 새로운 어업기지가 됐다.

어업기지가 북리로 옮겨졌어도 굴업도 파시는 바로 문을 닫지는 않았다. 1925년 인천-굴업도 정기항행이 개시돼 옛 영화를 찾는 듯했지만 북리항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는 1930년대부터 그 주도권을 상실하고 결국 민어파시의 왕좌를 넘겨주고 말았다. 덕적도 어장은 민어 뿐 아니라 조기, 새우, 게 등도 다수 어획돼 그 산업적 가치가 더욱 중요시됐다. 일제당국은 중·일전쟁의 결과가 호전된 1937년부터 연평도와 덕적도에 대규모 어항(漁港)을 건립하고 대륙과 반도 그리고 내지(內地)를 연결하는 유통망을 이룩한다는 이른바 '서해의 호수화(湖水化)' 사업을 추진했다. 1938년 북리 방파제의 착공식이 있었고, 선미도 등대의 준공식도 가졌지만 이후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예정대로 공사를 진행시킬 수가 없었다.

북성포구와 조기
북성포구는 인천역에서 월미도로 가는 초입에 위치해 있는데, 일제는 1929년 11월부터 1931년 3월까지 수산물유통을 위해 북성동 해안 일대 1111㎡(약 3668평)을 매립하고, 대규모 수산물 공판장과 어시장을 들어서게 했다. 그리고 이시기에 현재의 대한제분 건너편에 어업용 제빙공장을 설립해 어선과 시중에 얼음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1980년대까지 북성포구는 수도권 최대의 포구이며, 어시장으로 명성을 누리게 됐다. 파시(波市)때면 대형 어선 100여척이 만선의 깃발을 펄럭이던 북성포구는 1975년 연안부두 일대가 매립되자 북성포구와 화수부두에 형성됐던 어시장이 연안부두로 이전하게 됨에 따라 파시의 추억까지 사라져 버리게 됐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