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이영태의 한시로 읽는 인천 옛모습
34>김용(金涌)의 부평 노래 제13장
34>김용(金涌)의 부평 노래 제13장
제12장을 통해 보건대, 부평은 넓디넓은 평야와 뭐든 낚을 수 있을 듯한 물가, 그리고 순박한 인심이 어울려 있는 공간이었다. 육지이건 물가이건 산물(産物)이 풍족하니 사람들 간에 사소한 송사(結繩, 결승)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특히 '구름처럼 몰려든 여자들이 있다 해도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은 흰 저고리 쑥색 수건을 쓴 여인(縞衣綦巾聊樂我)'이라는 《시경(詩經)》의 구절을 견인하여 부평 여인을 그려낸 것이 주목된다. 비록 가난하고 누추하나 그런대로 스스로 즐길 수 있는 여인을 지칭하는 게 '흰 저고리 쑥색 수건(縞衣綦巾)'이란 표현이다. 작자는 부평의 여인들을 통해 《시경(詩經)》의 구절을 기억해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에게 바라는 바는 모두 여기' 부평에 있다며 제12장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다음은 제13장의 노래이다.
洋洋左右有餘師(양양좌우유여사) 좌우에 충만할 정도로 스승이 있고
格言嘉謨如掌指(격언가모여장지) 격언과 좋은 계책은 손으로 가리키는 대로 있네
千載芳蹤亦可尋(천재방종역가심) 천 년의 아름다운 자취 역시 찾을 수 있고
佳處萬里如身履(가처만리여신리) 경치 좋은 곳 만 리는 내가 가본 것 같네
此外紛紛何足道(차외분분하족도) 이밖에 분분하게 말해 무엇하리
觀於海者難爲水(관어해자난위수) 바다를 본 자는 물 되기 어렵다네
優游於此足以送餘齡(우유어차족이송여령) 이곳에서 유유자적 남은 인생 보내기에 족하지
所冀身無大過耳(소기신무대과이) 바라노니 몸에 큰 허물이 없으니
噫乎吾舍此復何歸(희호오사차부하귀) 아, 여기를 버리고 다시 어디로 갈꼬
歸歟歸歟多樂事(귀여귀여다악사) 돌아가리 돌아가리 즐거운 일 많은데
明朝掛冠便拂衣(명조괘관편불의) 내일 벼슬을 그만두고 옷자락 털어낼 터
取筆書之所以志(취필서지소이지) 붓을 잡아 생각한 것을 쓰네
제13장에서도 부평 예찬을 하고 있다. 부평 일대를 조망해 보니, 대상들은 나의 스승으로 삼기에 족할 정도로 조화롭게 펼쳐져 있었다. 넓은 평야와 그것의 끄트머리에 있는 듯 없는 듯 자리 잡고 있는 산은 과거에 '산빛이 있는 듯 없는 듯하다(山色有無中)'며 성현(成俔, 1439~1504)이 부평에 대해 남겼던 인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천 년의 아름다운 자취'를 운운하며 이곳의 첫 지명 주부토(主夫吐)에서 장제(長堤), 수주(樹州), 안남(安南), 계양(桂陽), 길주(吉州)를 거쳐 부평(富平)이란 지명이 정착된 과정을 기억해 냈을 것이다.
특히 '이밖에 분분하게 말해 무엇하리, 바다를 본 자는 물 되기 어렵다'며 《맹자(孟子)》의 특정 구절을 견인하여 부평의 경관이 지닌 우수성을 진술하는 부분이 이채롭다. '공자가 노나라 동산에 올라가 노나라를 작게 여겼고, 태산에 올라가 천하를 작게 여겼다. 그러므로 바다를 본 자는 물이 되기 어렵다(孔子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 故觀於海者難為水)'는 구절이 그것이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의 구절이 성인의 도가 큼을 나타내려는 표현이었다면, 김용(金涌)은 그것을 부평의 좋은 경치를 이미 봤으니 딴 데 가봐야 소용없다는 뜻으로 구사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를 버리고 다시 어디로 가겠냐'며 부평의 경관을 예찬하고 있다.
맡은 일을 마무리하고 서울로 떠나야 할 사람이 과도한 수사를 동원하여 부평에 대해 읊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김용에게 부평은 꽤나 인상이 깊었던 공간이었던 것 같다. 《시경》, 《맹자》의 구절을 그대로 사용하며 부평 예찬을 하고 있다.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그 안에서 부평사람들이 자족하며 사는 모습이 작자를 부평 예찬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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