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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전철을 타고 서울 가는 길이었다. 코앞서 벌어진 자리다툼이 오래 전에 경험했던 똑같은 사례와 겹치는 순간 씁쓸했다. '노약자 석'에 30대 중반의 젊은이가 앉아 있었다. 한 역을 지나자 머릿결이 희끗한 70대 노인이 오르더니 '노약자 석'에 낯짝 두껍게 앉아있는 그에게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싫다는 뜻을 침묵으로 대신했다. 노인은 재차 비켜달라고 하자 퉁명스런 말투로 '노약자의 좌석은 젊은이도 몸이 아프면 앉을 수 있다'라고 항변했다. 실제로 그는 환자로 보이진 않았다, 노인은 '젊은이가 예의 없이 어른공경 할 줄 모른다'며 버럭 화를 냈다. 그는 "아저씨가 뭔데 함부로 말을 하냐"며 대꾸했다. 시쳇말로 싸가지 없는 녀석이었다. 서로가 언성은 높아져 주위가 소란해졌는데도, 승객들은 냉소적인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끝내 두 사람은 주먹다짐으로 번질 일보 직전인데도 바라만 보고 있을 뿐, 아무도 만류한 사람이 없었다. 그때 내가 젊은이를 향해 큰소리로 "젊은이가 잘못 했어!, 자리를 비켜드린 게 도리지"라고 다그쳤더니 다행히도 먹혀들었다.

실로 나이 들어도 성깔은 늙지 않는다는 말처럼 노인들도 자신의 독선과 아집을 버리지 못한다. 그래도 내가 개입해 가까스로 한바탕 소동은 방점을 찍었다. 옛 속담에도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부치라고 했지 않는가. 물론 누구나 전철을 이용하다보면 이런 불미스런 사례를 가끔 목격했을 것이다. 현대 사회는 기본예절도 모르는 일부 젊은 세대들이 어른들의 충고에도 반발하는 세태다. 자칫 잘못하면 남의 싸움에 공연히 끼어들었다가 오히려 망신과 봉변을 크게 당하기 일쑤다. 그래서인지 남의 일에 나서지 않은 게 오늘의 현실이다. 그렇지만 불의에 침묵하고 공분할 줄 모른다면 성숙한 사회라고 말할 수가 있는가.

젊은이의 불손한 태도를 목격하고도 나와는 이해관계 없다며 무관심과 구경거리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 뿐만 아니다. 어떤 젊은이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잠자는 채 앉아 있기도 하고, 또한 사지 멀쩡한 사팔눈의 장애인도 앉아 있다. 이런 사례는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거의가 가정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결손가정에서 성장 또는 유전적인 성격 결함을 지닌 반사회성을 지니고 있다. 한편 나는 '노약자'를 '늙어서 기운이 쇠약해진 사람'이라고 개념 이해를 해왔다. 어느 날 국어사전을 펼쳐보니 '늙은이와 연약한 어린이, 늙은이와 병약한 사람, 늙어서 기운이 쇠약함'으로 기록돼 있다. 뜻이 다양하게 해석돼 있어, 사실상 남녀노소막론하고 앉아 있어도 될 좌석이다. 일례를 들어 젊은이도 자신이 병약하여 노약자석에 앉아 있다고 거짓말을 해도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사실 철도 당국의 이상한 행정으로 분쟁의 소지를 만들어 놓았기에, 싸움의 개연성은 잠재된 것이다. 가끔 '노약자 석'에는 새파란 술 취한 남녀가 앉아 있고, 그 앞에 노인은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 모습도 보았을 것이다.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총인구의 12%를 넘어서 고령사회로 진입해, 수도권에는 약 300만 명이상 노인이 거주하고 있다. 그럼에도 전철 한 차량마다 한편 또는 양편에 '노약자 석'이 설치되어 한편에는 3인만 앉을 수가 있다. 이마저 "노약자·장애인· 임산부보호석"란 노란 표찰 때문에 실제로 노인 전용석이 아니다. 철도 당국이 노인공경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노약자·장애인.임산부보호석'을 '노인 석'으로 표찰을 바꿔 붙여 놓아야 맞지 않는가.
70대 노인도 몸 관리 잘 하고 패션 감각이 뛰어난 분은 60대로 보인다. 그래서 이런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 어떤 분은 몸을 가누지 못한 노인들에게 "집에 계시지, 밖에는 왜 나오느냐"하며 노골적으로 노인 폄훼 발언을 하고, 짜증을 내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일반석에 노인들이 앉아 있으면 눈총을 받는다. 또 옆에 앉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젊은 임신부에게는 좌석에 앉으라고 권하는 게 상례이다. 이때도 젊은이 보다는 부모 같은 나이든 분들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현대사회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 욕망으로 치닫고 있다. 따라서 남에게 양보하고, 배려하지 않는 경향이 갈수록 심화되어 간다. 어느 시대나 노인공경은 아름다운 덕목이다.

젊은이가 기세 넘친다고, 노인을 무시하고 힘을 과시한다면, 그건 동물세계나 다름없다. 특히 유교 문화권인 한국사회가 노인공경의 전통적 풍속이 희박해지고, 시나브로 사라져가는 게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사회가 급격히 산업화되면서 비도덕적, 비양심적, 반인륜적 끔직한 사건사고가 잊을만하면 터진다. 아무리 빵이 넘쳐도 경로사상이 없는 세상을 문명국가라고 단정할 수가 없다. 또한 노인을 천시하고 홀대하면 젊은이들 노후에 똑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노인들 공경은 만고불변의 인륜 도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