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이영태의 한시로 읽는 인천 옛모습 32)허봉과 부평
▲ 인주기사제(仁州寄舍弟), <하곡집(荷谷集)>
 허봉(許篈, 1551~1588)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다. 호는 하곡(荷谷)이고, 저서로는 ≪조천록(朝天錄)≫, ≪이산잡술(伊山雜述)≫, ≪북변기사(北邊紀事)≫, ≪하곡집(荷谷集)≫ 등을 남겼다.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의 오빠이며,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과 <홍길동전(洪吉童傳)> 등을 지은 허균(許筠, 1569~1618)의 형이다.

 18세에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였고, 이후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 이조좌랑(吏曹佐郞),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임금의 앞에서도 강력히 직간(直諫)할 정도로 강개한 성품을 지녔기에 벼슬길에 부침이 많았다. 부모에게 문안을 드리는 일 외에는 방안에서 독서만 하였다.

 허봉(許篈)과 부평과의 인연은 공무를 수행하면서 부평객관에 머물 때와 유배에서 풀려나 인천을 유람할 때의 한시(漢詩)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부평객관(富平客館)>
 終南咫尺望京華(종남지척망경화) 종남산 지척에서 서울을 바라보다
 傍海愁聞去路賖(방해수문거로사) 해변가에서 갈 길 멀어 시름겨워 하네
 怊悵宦遊春又晩(초창환유춘우만) 슬프다, 벼슬하며 떠돌다보니 봄은 또 저무는데
 夕陽關樹正飛花(석양관수정비화) 해질녘 변방의 나무는 정히 꽃잎 날리네
 
 1583년 2월 경기수무어사(京畿巡撫御史)로 파견되어 군기(軍器)를 점검할 때, 부평객관에서 지은 시이다. 종남산(남산) 근처에 있다가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부평에 도착했다. 첫 파견지가 부평이었기에 앞으로의 '갈 길을 멀게(去路賖)'만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느낌의 배후에는 '한 해가 저물고 있는데 나는 아직 벼슬살이 하고 있네'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공무를 수행하면서 '슬프다(怊悵)'고 진술한 것은, 작자의 바람이 '벼슬'보다는 독서(讀書) 및 저술활동에 전념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을 못하고 있기에 마음속은 항상 '국경의 변방'처럼 추위와 긴장감에 휩싸여 있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부평의 꽃나무를 '변방의 나무'로 받아들였다. 봄이 저물고 꽃잎이 날리는 상황에서 작자는 자신의 바람도 꽃잎과 더불어 날아간다고 느꼈던 것이다.
 
 <인천에서 아우에게 부치다(仁州寄舍弟)>
 星河垂地泬寥寥(성하수지혈요요) 은하수 낮게 깔려 쓸쓸함을 뿜어내고
 午夜寒霜集柳條(오야한상집류조) 한밤중 찬 서리는 버들가지에 모였네
 何事漢江連碧海(하사한강련벽해) 무슨 일로 한강은 푸른 바다와 잇닿아 있더라도
 不將音信寄歸潮(불장음신기귀조) 돌아가는 조수(歸潮)에 소식 부치지 않으리
 
 아우에게 부치다(寄舍弟)라는 제목으로 보건대, 서울에 있는 허균에게 자신의 소회를 전하는 시이다. 1583년 8월 창원부사로 제수 받고 부임지에 왔는데 그날로 갑산으로 유배 명령을 받았다. 2년 후 유배에서 풀려나 인천과 춘천 일대를 유람하면서 시문을 남겼는데, 그 중에 하나이다.

 대상을 관찰하고 그것을 풀어내는 데에도 억울한 유배생활의 흔적이 녹아 있다. '쓸쓸함을 뿜어낸 듯한 은하수'와 '버들가지에 엉긴 찬 서리'는 작자의 심사를 반영한 표현이다. 이런 상태에서 형제에 대한 생각이 간절하겠지만, 혹여 자신 때문에 형제들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기 마련이다. 인천의 푸른 바다는 한강과 맞닿아 있어 물길을 따라 쉽게 갈 수 있지만, '돌아가는 조수에 소식 부치지 않으리'라는 게 그것이다.

 ≪하곡집(荷谷集)≫ 연보에 손곡(蓀谷) 이달(李達, 1539∼1612)이 "공의 시는 장편과 단편이 청아하고 웅장하면서 호탕하여 이백의 유법(遺法)을 깊이 체득하였고, 오언시(五言詩) 역시 청아하고 격이 높아 당시(唐詩)에 가깝다(公詩長篇短韻 淸壯動盪 深得靑蓮遺法 而五言亦淸邵逼唐)"며 허봉의 시문에 대해 평가해 놓았다.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