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이영태의 한시로 읽는 인천 옛모습
30)최석정(崔錫鼎)과 소래산
▲ 명곡집(明谷集)에 있는 '우음(偶吟)'.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고 저서로 명곡집(明谷集) 36권이 있다. 편서로는 좌씨집선(左氏輯選), 운회전요(韻會箋要), 전록통고(典錄通考) 등이 있다. 숙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진천 지산서원(芝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작자가 벼슬을 그만 두고 머문 곳은 소래산 아래였다. 소래산은 시흥과 인천을 경계하고 있지만 원래 인천의 진산(鎭山)이었다.
 
 <우연히 읊다(偶吟)>
 投紱歸來臥邵城(투불귀래와소성) 관복을 벗어던지고 돌아와 소성에 누우니
 海山雲物自怡情(해산운물자이정) 바다와 산 구름이 절로 즐겁기만 하네
 絶憐墩姓同康節(절련돈성동강절) 애틋할사 고향의 이름은 강절 선생과 같으니
 經世書中了半生(경세서중료반생) 경세서 끼고 반평생 마치리
 
 작자는 벼슬을 그만두고 인천에 돌아온 것을 무척 기뻐하고 있다. 관복을 벗고 난 후 눈에 포착된 인천 앞바다와 주변의 산, 그리고 구름은 예전과 달리 보이기까지 했다. 마침 자신이 돌아온 '소성(邵城, 인천)'이란 공간의 '소'자가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송(宋) 나라 때의 학자 소옹(邵雍, 1011~1077)의 이름 '소'자와 동일했기에 그의 행적을 좇으며 사는 게 운명인 듯했다. 만년(晩年)에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즐겼던 소옹의 호가 강절(康節)이었기에 자신도 '경세서 끼고 반평생 마치(經世書中了半生)'겠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그가 두 차례에 걸쳐 소래산 아래에서 소성록(邵城錄)과 후소성록(後邵城錄)이라는 시집을 묶은 것도 이런 이유와 관련이 있다. <우연히 읊다(偶吟)>에서의 다짐을 시집으로 실천했던 셈이다.
 
 <묻혀 살며 회포를 말하다(幽居述懷)>
 蘇山之下可棲遲(소산지하가서지) 소래산 아래는 세상을 피해 살만한 곳
 差喜身閑未老時(차희신한미로시) 조금 기쁜 일은 몸이 한가하고 늙지 않은 것이네
 野鶴風前多逸響(야학풍전다일향) 들판의 학은 바람 앞에서 듣기 좋은 소리로 울고
 江梅雪後有疏枝(강매설후유소지) 강가의 매화 가지는 눈 내린 후 성글었네
 學非杜預那成癖(학비두예나성벽) 배움은 두예가 아닌데 어찌 벽(癖)을 이루겠으며
 字到楊雄漫識奇(자도양웅만식기) 글자는 양웅에 미치어 기이한 글자를 잘 알겠나
 村逕不嫌來往少(촌경불혐래왕소) 시골길 왕래가 드물어 싫지 않지만
 箇中眞樂只心知(개중진악지심지) 그 속의 진짜 즐거움을 마음으로 알 뿐이네
 
 작자는 소래산 아래에서의 생활에 크게 만족하고 있다. 그가 소래로 돌아오기 전, 그는 노론과 소론의 격렬한 당쟁 속에서 보냈다. 1701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왕세자의 보호를 위해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처형에 반대하다가 진천에 부처(付處)되기도 했고 이듬해 풀려나 판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영의정이 되기도 했다. 모두 여덟 차례 영의정을 지낼 정도로 그의 관직생활은 '몸이 한가하고 늙지 않은 것'의 반대 상황이었다. 그래서 소래산 아래에 살며 '몸이 한가하고 늙지 않은 것'을 즐겼던 것이다.

 두예(杜預)와 양웅(楊雄)을 등장시킨 것은 그들이 특정 분야에 일가(一家)를 이룬 것에 기대 그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처지가 낫다고 진술하기 위해서이다. 진(晉) 나라 사람 두예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매우 좋아하여 스스로 좌전벽(左傳癖)이라 칭하였고, 한(漢) 나라 양웅은 경전에 훈고(訓詁)를 찍어 훈고학의 길을 열은 자이다. 양웅은 호사가들이 술을 싣고 찾아와 글자를 물을 정도로 고문(古文)의 기이한 글자를 많이 알았다. 그래서 그들처럼 되지 못할 바에 한적한 시골에서 학 울음소리, 매화 가지를 통해 예전에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느끼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시의 제목 <묻혀 살며 회포를 말하다(幽居述懷)>처럼 '묻혀 살며' 마음속으로 즐거움을 느끼면 그만이다.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