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32.미두취인소
日, 국내 미곡시장 장악목적 지역 설립
▲ 인천미두취인소 건물과 미두 거래 장면.
'한국증권협회40년사'는 우리나라 증권 시장의 효시를 '인천미두취인소'라고 밝히고 있다.

'취인소'란 '거래소'의 일본식 명칭이다.

설립 시기나 업무 내용 등을 보더라도 증권협회가 말한 그대로 인천미두취인소가 체계를 갖춘 국내 최초의 증권 시장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일제가 굳이 인천에 취인소를 세운 데는 이유가 있었다.

대일 미곡 수출을 인천의 객주가 주도해 온데다가 신상회사와 근업소의 힘이 막강해 이를 와해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일본인 미곡상 14명과 인천일본인상업회의소가 1896년 4월 1일 취인소의 설립 허가를 받아냈다.

그러나 큰 문제가 있었다.

설립 허가를 내 준 곳이 우리 정부가 아니라, 인천 주재 일본영사관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인천상공회의소 90년사'는 "참으로 어이없는 노릇이었다.

수탈 기관을 자의로 허가하였다는 것은 일제의 지나친 오만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증권 거래가 주식, 채권 등 유가증권을 대상으로 한다면 미두취인소는 쌀, 콩, 석유 등 7개 품목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만 달랐다.

취인소는 설립 직후부토 미곡 유통시장을 장악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꾼들이 조선 팔도 각처에서 몰려오면서 사회적인 해악도 컸다.

중매점을 운영해 돈을 번 인천의 유군성, 조준호, 개성부자 김익환, 평안도 지주 장최근 등과 반복창 같은 인물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패가망신의 길을 걸었다.

그와 함께 인천항 일대에서는 여관, 요릿집, 주점 등 향락 산업이 전국 어느 도시보다도 성행했다.

1920년대의 종합지 '개벽'(제56호)이 '인천아, 너는 어떤 도시?'라는 제목의 글에서 "인천미두취인소는 피 빨아들이는 악마굴"이라고 지칭하며, "미두 시세가 아무리 좋다한들 인천 부민이나 인천부의 번영에 무엇이 도움이 되며, 무슨 관계 있으랴!" 면서 그 폐해를 질타했다.

인천에서 펼쳐진 '최초'는 선구적 역사의 전개로 우리가 근대적인 삶을 향유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개중에는 부정적인 분야도 없지 않았다.

'돈바람'을 일으켰던 미두취인소는 1931년 조선거래소령에 따라 경성거래소에 운영권을 빼앗겨 경성거래소 '기미부'로 축소됐다.

1937년 중일전쟁 때 휴업했다가 광복 후에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