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체성 찾기] 강덕우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28) 백범 김구, 인천에서의 두 번의 옥고(獄苦)
▲ 감옥이 있었던 인천감리서.
▲ 백범 김구와 곽낙원 여사의 동상.
백범 김구(1876~1949)가 1946년 전국을 순회할 당시 맨 처음 들른 곳이 바로 인천이었다. "나는 38 이남만이라도 돌아보리라 하고 제일 먼저 인천에 갔다. 인천은 내 일생에 뜻 깊은 곳이었다. 스물두 살에 인천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스물세 살에 탈옥 도주하였고, 마흔 한 살적에 17년 징역수로 다시 이 감옥에 수감되었다. 저 인천 축항(築港)에는 내 피와 땀이 배어 있는 것이다." 할 정도로 인천에 대한 강렬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치하포의 거사
1896년 3월9일. 황해도 해주부 안악군 치하포에 머물렀던 21세의 청년 김구(당시 이름은 김창수)는 그 곳에서 칼을 차고 한국인으로 변장해 활동을 하고 있던 일본인 쓰치다를 처단하고 "국모보수(國母報讐)를 목적으로 이 왜놈을 죽이노라"하는 포고문과 함께 '해주 백운방 기동(基洞) 김창수'라는 자신의 거주지와 성명을 써놓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사건은 명성황후가 일본인 자객들에게 살해된 '을미사변' 이후 이른바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중에 있었던 거사로, 김구의 일생에 일대 전환점을 가져온 사건이었다.

1893년 김구는 18세의 나이에 동학에 입도하고 이름을 김창암(金昌巖)에서 김창수(金昌洙)로 개명했다. 그는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의병부대에 몸담아 '척양척왜(斥洋斥倭)'를 내세우며 일본군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동학혁명이 일본에 의해 진압되고 을미사변, 단발령 등으로 민심은 흉흉해졌다. 백성들의 분기는 탱천해 이곳저곳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반일감정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치하포의 거사는 김구가 위정척사사상을 수용하고 나서 일으킨 '의거(義擧)'로, 이후 김구 자신에게도 애국적 행위로 큰 자부심을 줬다.

인천 개항장재판소
황해도 해주부(海州府)에서는 안악군수의 사건 전말 보고를 통해서 김창수(김구)가 '치하포 사건'의 주역임을 파악했고 사건이 발생한 지 세 달이 훨씬 넘어서야 김구를 체포했다. 김구는 해주부에서 곧 바로 심문을 받았지만 그 자체가 외국인이 관련된 사항이며, 특히 일본인 살해사건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일본영사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영사관 측으로서는 치하포사건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자신들도 포함돼 조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고 그에 적당한 곳이 바로 인천 개항장재판소였다.

김구는 개항장재판소에서 3차에 걸친 신문을 받으면서 그의 거사가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임을 천명해 관리들과 수감자들은 물론 인천 시민들에게 큰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1897년 백범은 일본의 압력으로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사형집행 직전 고종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됐다. 법부에서 김창수의 처리문제를 유보하라는 답전(答電)을 인천 감옥으로 내려 보낸 것이었다. 이때 인천 감리서가 받은 것은 '전화'가 아니라 전보(電報)였다.

그러나 감옥 밖의 구출운동이 한계에 이른 것을 깨달은 백범은 1898년 3월19일 밤 탈옥이라는 비상수단을 감행했다. 탈옥자 중 유일하게 정치적 문제가 걸려 있는 김구의 부친을 구속, 수감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구는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 1900년 김창수라는 본명을 거북 '구(龜)'자로 개명하고, 교단 일선에서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했다. 20대 후반에는 기독교를 수용하고 신교육운동이 최선의 구국방책임을 주장하면서 본격적인 교육계몽운동에 투신했다.

1905년 일본이 강제로 조선과 을사조약을 맺은 뒤부터 김구의 애국운동은 더욱 박차를 가했다. 비밀애국계몽단체인 신민회 회원이 된 김구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만주에 무관학교를 세워 광복군을 키우기로 뜻을 세웠다.
당시 한국인의 저항은 여러 형태로 일어났다. 1909년 10월 안중근의 의거가, 12월 이재명의 의거가 있었다. 백범은 안중근의 의거로 잠시 해주 감옥에 수감됐으나 무혐의로 곧 출감했다. 그러나 1911년 '안악사건(일명 안명근 사건)'에 연루돼 15년 징역을 언도받았고 수감 중에 터진 '105인사건' 에 걸려 또 2년을 추가 받아 17년의 징역에 처하게 됐다.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5년으로 감형됐지만 감옥소 일본인 과장과의 대립 등으로 당시 '악명 높던' 인천 감옥소로 이감되는 보복조치를 당했다. 인천에서의 두 번째 감옥생활이었으나 매일 다른 죄수와 쇠사슬로 허리를 마주 매어 묶인 채 강제로 인천 축항공사 현장에 나아가 노역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인천대공원의 모자상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은 그의 그림자였다. 인천항 물상객주 집을 찾아가 바느질과 밥 짓는 일을 해주며 그 대가로 감옥에 매일 사식을 넣었고, 사형선고를 받은 아들을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것을 보고 들으며 감옥 안의 사형수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인천에서 씩씩한 어머니 투사가 되어 있었다.

백범 김구는 한국 독립운동에 있어 상징적인 존재로 아직까지도 '독립운동'이라 하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생각하게 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하면 백범 김구를 떠올리는 것이 일반인들의 생각이다.

옥중에서 이름을 거북 '龜(구)'에서 아홉'九(구)'로 바꾸고, 호를 '가장 낮은 사람'이라는 뜻의 '백범(白凡)'으로 바꾸었다. 그런 그의 동상이 인천대공원 한적한 곳에, 그의 탈출로였던 성현(星峴, 벼리고개, 만수동에서 부평으로 넘어가는 고개) 인근에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함께 나란히 세워져 있는 것은 모자(母子)의 행적이 인천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