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30.전환국
개항장 인천은 외국은화 각축장 돼
▲ 인천전환국에서 발행한 5냥 은화. '大朝鮮' 자가 보인다.
개항 직후, 인천항의 무역은 점차 활발해져 갔지만, 거래에 쓰인 화폐는 전근대적인 당백전과 당오전이 대부분이었다.

엽전의 소재인 동(銅)의 국제시장 가치가 일정하지 않았고, 무게도 많이 나가 불편했다.

외국 관광객들은 소잔등에 엽전꾸러미를 잔뜩 싣고 다녀야 했다.

그 같은 불편을 해소하고자 정부는 신식 화폐를 발행하려고 1886년 경성전환국을 설치하고, 1환(환) 은화, 5문(文)과 1문 적동화 등 3종의 주화를 제조했는데, 소량인데다가 발행에 이르지는 못했다.

신식 화폐가 정작 발행된 것은 경성전환국을 폐지하고 1892년 인천에서 문은 연 인천전환국(仁川典局)에 의해서였다.

같은 해 인천전환국은 5량 은화, 1량 은화, 2전5푼 적동화, 1푼 황동화 등 5종의 주화를 발행했다.

비로소 인천에서 신식 화폐 시대를 열렸던 것이다.

그 무렵, 경성에 머물며 위세를 부리던 청국의 원세개가 웃지 못 할 시비를 걸었다.

인천전환국에서 만든 주화에 새긴 '대조선(大朝鮮)' 자에서 '대(大)' 자를 빼라고 강압했던 것이다.

대국은 오로지 청국밖에 없다, 조선이 어찌 방자하게 대국이라 구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힘없는 정부는 그 일부를 폐기하고, 그 후에 주조한 주화에서 '대' 자를 빼는 수모를 감수해야만 했다.

1894년 7월 정부는 '신식 화폐 발행 장정'을 공포해 근대적 화폐제도를 마련했다.

이때 은본위 제도를 채택했는데, 본위 화폐는 5냥 은화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본국의 화폐와 동질·동량·동가인 외국화폐를 혼용할 수 있다고 한 장정 제7조의 규정에 따라 우리의 5냥과 같은 일본의 1원(圓)과 멕시코 은화가 유통되었고, 1889년 중국에서 만든 1원(元) 은화도 나돌면서, 개항장 인천은 외국 은화의 각축장이 되기도 하였다.

1982년 12월부터 1898년 8월까지 인천전환국에서는 4백31만6천 환의 신식 주화를 발행했는데, 백동화의 남발로 물가가 폭등하는 등 경제적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그달 말, 일본으로부터 우리의 화폐권을 지키려는 의도에서 정부가 용산전화국을 설치하고 기계를 이전해 가자, 인천전환국 시대는 설립 9년 만에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