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체성 찾기] 강옥엽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27> 행정 변천으로 보는 인천 - 인천 가치 재창조의 시작
▲ 여지도 속의 인천.
▲ 인천시 현황.
문학산 아래 작은 분지 미추홀로부터 출발한 인천은 현재 10개의 군구를 포괄하는 인구 290만의 대한민국 3대 도시로 발전했다. 그리고 그 공간은 2030년이 넘는 오랜 세월 속에 매소홀, 소성, 경원, 인주 그리고 인천이라 불렸던 다양한 이름처럼 복잡다단한 역사적 장소였다. 인천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 그것이 곧 인천 가치 재창조의 시작일 것이다.

인천 지명 변천과 행정의 변화
전근대 시기 인천의 지명 변천은 역사의 흐름이자 곧 행정의 변화였다. 비류의 미추홀(彌鄒忽)로부터 출발해 고구려 남하시기에 매소홀(買召忽)로 불렸고, 신라시대에는 소성현(邵城縣)이라 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경사의 원천'이라는 뜻에서 경원군(慶源郡)으로 삼았고, 인종때는 인주(仁州)로 명명하기도 했다. 고려말 공양왕때는 몰락해 가는 고려왕실을 높이는 의미에서 경원부(慶源府)라 불렀으나, 조선이 건국되자 다시 인주로 환원됐다가 지금의 '인천'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 조선 태종 13년(1413) 10월15일의 일이다.
근대에 이르러 1883년 인천이 개항되자 개항장의 내·외국인 문제 등을 관장할 행정기관으로 인천도호부를 대신하는 감리서(監理署)가 설치돼 여러 차례 존폐과정을 거치게 됐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일본은 경성, 인천을 비롯한 전국 12개 지역에 부제(府制)를 실시했는데, 당시 인천부의 성립은 일본인 위주의 도시를 건설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인천부는 현재의 중·동구지역만으로 축소됐고 나머지 지역은 부평군과 합하여 부천군으로 신설됐는데, 부평의 부(富)자와 인천의 천(川)자를 합한 것이었다.

축소됐던 인천부의 행정구역은 이후 일본의 중국대륙 진출에 맞춰 1936년과 1940년 확대되면서 옛 인천부지역과 부평이 인천부에 편입됐다. 광복 후 1949년 8월15일 지방자치법의 시행에 따라 인천시로 바뀌었다.

1968년에는 출장소를 폐지하고 구제(區制)가 실시되면서 중구, 동구, 남구, 북구의 4개구가 설치됐다. 현재 남아 있는 중구, 동구, 남구의 구명(區名)은 이때 만들어진 것인데 당시 전국적으로 이러한 방위 개념의 명칭들이 사용되면서 고착화되어 50년 가까이 흐르다보니 지금의 도시구성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을 가리키는 구명(區名)으로 남게 됐다.

인천 군구별 역사적 특성과 행정의 변천
인천광역시 10개의 각 군구에는 그 지명에 따른 나름의 역사가 있다. 이를 공통된 특징으로 4개의 권역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 인천 역사의 원류를 찾을 수 있는 '전통문화의 출발지, 역사고도(歷史古都)' 남구와 여기서 분리돼 '과거와 미래가 융합된 도시의 전형'을 보여주는 남동구와 연구수가 하나의 권역을 이루고 있다. 남구는 문학산 주변으로 일찍부터 비류의 미추홀로 자리했고, 삼국시대 이래 원(原)인천지역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1883년 제물포 개항과 일제강점기를 통해 인천부의 주변지역으로 변했고, 1968년 구제(區制)가 실시되면서 당시 인천시청이 자리한 중구에 대비된 방향 개념의 남구라는 명칭으로 불려지게 됐다. 그럼에도 남구 일대의 인구와 도시 팽창은 1988년 남동구, 1995년 연수구 분구(分區)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남동구는 남촌면과 조동면을 조합한 이름으로, 연수구는 연수리라는 옛 지명을 갖게 됐지만, 남구만은 '학산', '성산' 혹은' '문학' 등 옛 지명을 회복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다.

둘째, '근대 개항장'이자 '근대문화의 산실'인 중구와 동구가 있다. 제물포 개항 이래 일제강점기 인천의 중심부로 기능하면서 당시의 건축물 등 역사적 흔적들이 남아 있어 오늘날 반면 교육의 현장이 되고 있다. 1985년 인천시청이 남동구로 옮겨감에 따라 1968년 구제실시 당시 '중구'나 '동구'로서의 기능은 상실하고 '제물포'나 '송림', '화도진' 등의 옛 지명을 찾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말았다.

세째, '전통문화와 근현대사가 공존' 하는 부평, 계양, 서구가 또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공통적으로 옛 부평도호부 관할 지역으로 한강이나 바닷가와 밀접해 교통과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이 일대는 여러 차례 행정 변화를 갖게 되는데, 고려시대에는 수주(940), 안남도호부(1150), 계양도호부(1215), 길주목(1308), 그리고 충선왕 2년에 부평부(1310)로 개칭됐다. 조선시대 부평도호부는 독립적 행정의 한 축을 담당하기도 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부천이 되었다가 인천부역(府域) 확장 때 다시 인천으로 편입되는 변화를 경험했다. 1968년 구제가 실시되면서 북구라 불렸는데, 1988년 구세(區勢)가 확장되자 '서곶' 대신 서구로 먼저 분구됐고, 1995년 인천광역시가 되면서 제1경인고속도로를 경계로 위쪽은 계양구, 아래쪽은 부평구로 분구되면서 옛 지명을 갖게 됐다.

넷째, 서해지역 '해양문화의 원형'을 간직한 강화군과 옹진군이 또 하나의 유형을 이루고 있다. 갑비고차라 불렸던 강화는 고려 태조 때(940) '강화현'으로 개칭돼 천년의 시간이 흘렀다. 옹진군 역시, 서해 5도와 7개의 면, 25개의 유인도와 75개의 무인도로 이뤄진 해양문화의 보고(寶庫)이다. 고구려의 옹천(甕遷)에서 옹진으로 개명된 것은 고려 현종 9년(1018)이지만 옹진반도의 옹진이 아닌 현재의 옹진은 1953년 6·25전쟁이 정전되면서 탄생됐다.

인천 역사의 재발견, 새로운 가치 재창조
지역 정체성에 대한 문제의식보다는 도시의 외연적 확장을 지향했던 지난 세월 속에 인천은 1981년 인천직할시로, 1995년 강화군, 김포군 검단면, 옹진군을 편입해 광역시로 발전했다. 그리고 2015년 '광역시 행정 20년'이 되는 전환점을 맞게 됐다.

인천의 도시발전은 현재 인천광역시 10개 군구의 명칭에 또 다른 역사의 켜를 남겼다. 남구, 중구 등 비단 구(區) 이름만이 아니라 남부교육지원청, 제물포역, 수인선 송도역, 옥련동 축현초등학교 등과 같이 방향과 지명의 위치가 맞지 않는 경우가 생겨났다. 지금 그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이 곧 인천 가치 재창조의 시작이 아닐까 싶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