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현의 사진, 시간을 깨우다
26. 인천산 통기타, 세계를 노래하다
▲ 1965년부터 기타를 생산하기 시작한 청천동 삼익악기의 초창기 작업장의 모습. 비록 허름한 작업 환경이지만 그들의 손에서 '쎄시봉' 멤버들의 통기타가 만들어졌다.
삼익·영창 등 주요업체 연고

주요품목 통기타 지구촌 장악

88년 수출 2억달러 돌파 기염

90년대 들어서 경영환경 악화

향토기업 대부분 지방·해외로



영화 '쎄시봉'은 1960년대, 70년대 한국 가요계를 강타했던 포크의 열풍을 잘 묘사하고 있다. 포크 음악의 주된 악기는 '통기타'이다.

당시 젊음의 상징이었던 통기타의 대부분을 인천에서 생산했다. 인천에는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무대를 주름 잡았던 대형 악기제조업체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표적인 업체는 삼익악기와 영창악기였다. 지금은 주로 피아노를 생산하고 있지만 1970년대 말까지 기타가 주요 생산품이었다.

1958년 부평구 청천동에 터를 잡은 삼익악기는 처음엔 외국 악기를 수입해 판매하는 업체로 출발했다. 1960년부터 해외에서 부품을 들여와 단순 조립해 피아노를 제조했다.

독일에서 들여온 '호루겔'이라는 브랜드가 바로 그것이다. 삼익악기는 1965년 7월부터 기타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때 막 불기 시작한 포크 열풍에 힘입어 기타는 날개 돋듯 팔렸다. 청바지 입고 어깨에 기타 하나 메고 있는 모습은 당시 대표적인 청춘의 심볼이었다. 공원, 열차 안, 캠퍼스, 교회 등 어디를 가든 통기타 소리가 들렸다. 삼익악기는 1973년 한국수출산업단지(부평구 효성동)으로 공장을 확장해 옮기면서 세계 메이저 악기업체로 도약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악기산업은 일일이 손으로 만드는 노동집약적 산업으로 지역 고용에 많은 도움을 줬다. 밀폐된 허름한 공간에서 나무 먼지와 접착제 냄새를 맡으며 일했던 그들이 있었기에 가객(歌客) 김정호와 김광석 그리고 송창식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서울 영등포에 있던 영창악기는 1979년 인천 가좌동 8만5000㎡ 대지 위에 악기제조 종합공장을 건립해 이전한다. 대단위 악기공장을 준공하고 연간 4800대의 그랜드피아노를 생산함으로써 삼익악기와 더불어 세계 3위 악기제조업체로 발돋움한다.

쌍벽을 이루던 삼익악기는 창립 20주년을 맞아 미국, 유럽, 동남아 등 전 세계 50개국에 기타 55만대, 피아노 3만대를 수출했다. 비슷한 시기 가좌동에 자리 잡은 기타 전문업체인 서진악기는 한해 40만대의 기타를 생산해 전량 미국으로 수출했다. 이 회사는 매년 기타 하나로 당시 엄청난 액수인 300만달러를 벌어 들였다. 미국 통기타의 둘 중 하나는 '메이드 인 인천'이었다.

이렇듯 1980년대 인천은 명실공이 세계 악기의 본고장이 되었다. 1982년 미국 최대 악기업체 볼드윈사와 삼익악기사가 합작해 효성동에 한미악기를 설립한 것을 비롯해 가좌동 월드악기, 청천동 뮐러악기, 오류동(인천 서구) 성우악기, 갈산동 콜트악기, 고잔동 한독피아노 등 크고 작은 악기 제조업체들이 인천에 자리 잡았다.

이 업체들은 1987년도에 수출 1억달러를 달성한데 이어 이듬해 바로 다시 2억달러를 돌파하는 등 우리나라 외화 획득에 큰 공을 세운다. 사업이 잘되자 삼익악기는 실업축구팀까지 창단할 정도였다.

1990년대 접어들자 노사분규가 잦았고 세계 경기 침체로 수출이 주춤하면서 경영이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영창악기는 1995년 9월15일 세계적인 흑인가수 스티비 원더를 인천 피아노공장으로 초청해 현장에서 즉흥 연주를 하게 하는 등 제품 홍보에 나섰지만 지역의 악기업체들은 불황을 피해가지 못한다. 결국 세계 3대 피아노 생산업체인 삼익악기는 1996년 10월 법정관리를 신청한다.

인천시는 지역의 악기산업을 다시 활성화시키기 위해 2003년도부터 인천악기박람회를 개최했다. 격년제 꼴로 열리던 악기박람회는 현재 인천에서의 개최는 중단된 상태다. 대표적 향토기업이었던 영창악기는 경영 악화로 현대산업개발로 흡수된 후 2006년 본사를 성남시로 이전했고 법정관리를 벗어난 삼익악기도 2011년 충북 음성군으로 옮겼다.

세계 전자기타 시장의 30%를 차지했던 콜트악기는 2007년부터 극심한 노사분규를 겪으며 예전만큼 신나는 기타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