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현의 사진, 시간을 깨우다
24. 사라진 아이들의 골목 놀이
▲ 지금은 보기 힘든 사내아이들의 놀이 말뚝박기. 1958년 겨울, 빡빡 머리에 얇은 옷을 입은 초등학교 아이들이 인현동 골목에서 추위에 아랑곳 않고 즐겁게 놀고 있다.
6·25 후 마땅한 놀이공간 없어 미군차량 사고 잦아

인천시 시설원조·부지기부 받아 '유희장' 5곳 설치



요즘은 학원과 게임 등으로 인해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을 통 볼 수가 없다. 나이키의 경쟁 상대는 닌텐도라는 말이 있다. 게임에 빠지면 운동화를 신지 않기 때문이다. 자치기, 팽이치기, 제기차기, 줄넘기, 말놀이, 공기놀이, 실뜨기, 소꿉놀이, 숨바꼭질, 땅빼앗기 등 예전의 놀이는 질서와 룰을 배우고 협동심과 운동력을 키워주었다. 이런 놀이가 모두 사라졌다.

사진은 1958년 중구 인현동 어느 골목에서 말뚝박기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다. 요즘 시선으로 보면 굉장히 위험하게 보이는 이 말뚝박기는 사내아이들에게 꽤 인기 있었던 놀이였다. 놀고 즐길 장소가 변변하게 없던 당시에는 골목이 놀이터였다. 6.25 전쟁은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학교 시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이들은 놀이 시설이 없는 학교 운동장에서 놀기보다는 당시 신작로라고 불리는 집 앞 길거리에서 뛰어 놀았다. 그러다보니 자동차 사고가 빈번했다. 특히 질주하는 미군 차량에 의한 윤화(輪禍)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인천시에서 발행한 '인천공보' 1953년 8월5일자는 '도로 주변에서 노는 어린이로 인하여 빈발하는 교통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부심하여 오던 인천 주둔 미 제 21항만사령부 보안과에서는 어린이들에게 노름터(놀이터)를 제공하고자 시내 5개소에 유희장을 만들 계획을 세웠는데 시 당국과 완전한 합의를 보아 우선 신포동 동방극장 앞 공터를 유희장으로 지정하고 지난 2월부터 공사를 착수하였다'라고 보도한다. 당시에는 '놀이터' 대신에 '유희장(遊戱場)'이란 말을 사용했다. 이 신문은 이어 '1953년 12월29일 상오 9시부터 시의회실에서 제 4차 한미친선위원회가 열렸는데 미군 측에서 아동들을 윤화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아동유희장 5개소에 각각 3종류의 유희 도구를 기증할 것을 제안하여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전한다.

인천시에서는 5개의 유희장을 설치하기 위해 적당한 부지를 물색했다. 대상지는 공휴지와 귀속 대지 등에 한했다. 특이한 점은 시민 중에 이런 땅을 소유하고 있는 인사는 어린이 유희장 설치의 취지를 납득하고 자진해서 대지를 제공해 줄 것을 요망했다. 자진했는지 강제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인천시는 인천경찰서 관내 3개소, 동인천경찰서 관내 2개소의 부지를 확정했다. 당시 인천시장이었던 표양문 씨 집 근처 관동 100평, 인성초등학교의 전신인 송학동 무궁화공민학교운동장 250평, 사동 33번지 200평, 송현동사무소 근처 60평, 그리고 화수동 정미소 건너편 채소밭 200평 등이었다. 이 유희장에는 미군의 원조로 그네, 철봉, 미끄럼대, 평행봉 등을 설치했으며 눈에 띄는 것은 씨름터 까지 마련했다는 점이다. 이 5개의 유희장은 인천시가 만든 최초의 공립어린이놀이터가 아닐까 생각된다.

인천시는 내친김에 1955년 7월20일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역시 미군의 도움을 받아 그네, 미끄럼대 등 놀이기구와 각종 운동대를 갖춘 놀이터를 마련한다. 이즈음 정부에서는 어린이헌장을 선포한다. 1957년 5월5일 한국동화작가협의회에 의해 어린이헌장 9개항이 제정되었는데 그 중에 '어린이에게는 마음껏 놀고 공부할 수 있는 시설과 환경을 마련해주어야 한다.'라는 조항이 있다. 이후 각 시·도에서는 어린이놀이터 마련에 박차를 가한다.

놀이터가 속속 마련되었지만 그곳에서 노는 아이들은 소수였고 많은 아이들은 여전히 동네 공터와 골목에서 놀았다. 특히 여름이 되면 인천 아이들은 염전이나 갯벌 등 자연 놀이터에서 놀았다. 대표적인 곳이 용현동 낙섬, 주안 염전, 만석동 바닷가 등이었다. 이 때문에 물놀이를 하다가 많은 아이들이 익사 사고를 당했다.

특히 만석동 대성목재의 저목장(貯木場)은 목숨을 앗아가는 무서운 공간이었다. 여름철 아이들은 저목장에서 수영을 하거나 띄워 놓은 통나무 위에서 묘기를 부리며 뛰어 놀았다. 순간, 미끄러져 통나무 사이로 빠지면 굉장히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 원목 아래로 떨어지면 수압 때문에 물속으로 깊게 빨려 들어가고 빠져나오려 발버둥 쳐도 통나무에 막혀 쉽게 나오질 못해 목숨을 잃었다. 해마다 한 동네에서는 한 두 명의 아이들이 이런 사고를 당해 생명을 잃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 담임선생님들은 반 학생들에게 저목장에서 놀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곤 했다.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