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이영태의 한시로 읽는 인천 옛모습
25>가정동의 가정(佳亭)
▲ '태재집'에 있는 조서강과 유방선의 시문.
<부평부읍지> 고적조에는 "가정(佳亭)이 서곶면에 있는데 복흥군(復興君) 조반(趙胖, 1341~1401)의 별업이다"고 기록돼 있다. 조반은 조선을 개국할 때 공을 세워 개국공신 복흥군에 봉해졌던 자이다.

그의 아들 조서강(趙瑞康, ?~1444년)은 가정(佳亭)에서 만년(晩年)을 보냈다. 세종은 출사를 권했던 조서강이 끝내 응하지 않자 화공을 보내어 그가 사는 곳을 그림으로 그려서 바치게 했다. 한때 명사들이 가정에 모여 시를 지으며 즐겼기에 안평대군이 시문들을 모아 <석호가정별업도(石湖佳亭別業圖)>라는 화첩(畵帖)을 만들어 세종에게 올렸다고 한다.

가정이 있던 터, 가정지(佳亭址)는 가정동 456번지 4거리에서 서쪽 100m 지점에 있었다. 원래는 마을의 언덕 위에 있었지만 도시계획으로 그곳이 평지로 변하자 해당 공간에 비(碑)를 세웠다고 한다. 비문의 뒷면에 조서강의 시문이 새겨져 있다.

乘閒勝日到村家(승한승일도촌가) 한가롭게 좋은 날 촌가에 이르니
十里芳郊萬樹花(십리방교만수화) 십리 넓은 들판에 일만 나무 꽃 피었네
半醉騎驪無事客(반취기려무사객) 취한 듯 깬 듯 나귀타고 가는 일 없는 사람
泰平春興自堪誇(태평춘흥자감과) 태평성대의 춘흥 자랑할 만하네

한시를 통해 가정의 주변 풍경과 그 안에 있는 조서강의 춘흥(春興)을 읽을 수 있다. 가정의 넓은 들판에 꽃이 수없이 피었고 그 사이를 한가롭게 나귀타고 가는 사람이 있다. 나귀를 타고 가는 사람은 단어에 나타난 대로 '일 없는 사람(無事客)'이다. '취한 듯 깬 듯(半醉)'이 음주와 관련된 것인지 혹은 춘곤(春困)에 따른 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꽃이 만발한 즈음에 일 없는 사람이니만큼 작자는 농사일이나 그 밖의 것과 무관한 사람이다. 작자는 시각에 포착된 대로 봄기운이 주는 흥(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위의 한시에는 바다 관련 진술이 없지만, <석호가정별업도(石湖佳亭別業圖)>에 있는 정인지(鄭麟趾, 1396~1478)의 "남포로 돌아오는 돛단배는 줄지어 온다(南浦歸帆堪從日)"거나 황정혹(黃廷或)의 "만 리의 파도는 멀기만 하다(萬里波濤遠)"는 표현으로 보건대 가정에서 서쪽 바다를 조망할 수 있었다.

가정 주변의 풍경을 읊은 한시가 유방선(柳方善, 1388~1443)의 <태재집(泰齋集)>에도 수록돼 있다. 그것에 따르면 조서강이 시를 짓게 된 배경과 유방선에게 화답시를 구한 과정이 나타나 있다.

騎驢半醉一閒人(기려반취일한인) 취한 듯 깬 듯 나귀 타고 가는 한가한 사람
遊遍芳郊十里春(유편방교십리춘) 넓은 들판 두루 다녀보니 십 리가 봄이라네
今日已非無事客(금일이비무사객) 오늘은 이미 일 없는 사람이 아닌데
太平春興屬吾身(태평춘흥속오신) 태평성대의 춘흥은 내 신세일세

원주의 명봉산(鳴鳳山) 아래의 법천에 머물고 있던 유방선은 조서강이 사인(舍人)의 직책을 맡아 바쁘게 생활한다는 것을 듣고 비로소 화답시를 지었다. 조반의 시문과 동일한 듯하지만 '일 없는 사람(無事客)'이 '일 있는 사람(非無事客)'으로 바뀌어 있다. 조서강을 가리켜서 '오늘은 이미 일 없는 사람이 아닌데'라고 하고, 과거에 즐겼던 '태평성대의 춘흥은 내 신세일세'라며 자신의 한가한 처지를 진술하고 있다. 자구(字句)를 부분 첨가하여 화답시를 지었기에 작자 스스로 "이 때문에 비졸함이 드러나지 않게 조군 좌하에게 써서 드린다(是以不揆鄙拙 錄呈趙君座下)"며 부언하기도 했다.

조서강이 남긴 시문을 통해 가정(佳亭)에서 조망할 수 있는 꽃, 산, 들, 바다, 돛단배 등을 복원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작자는 '일 없는 사람(無事客)'이 아니라 가정(佳亭)에서 조망할 것들이 봄기운과 함께 사방에 있었기에 가장 바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태평성대의 춘흥 자랑할 만하다'고 진술했을 것이다.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