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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5년, 황제권력을 능가하는 절대권력을 구가하던 교황 우르바누스(Urbanus) 2세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 클레르몽에서 공의회를 개최하고 '이교도(異敎徒) 투르크족'으로부터 아나톨리아(Anatolia) 반도를 회복하자고 주창하며 성전(聖戰)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로써 기독교적 도그마(Christian dogma)에 사로잡혀 있던 중세 유럽은 이후 200여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십자군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야 했다.

종교적 광기(狂氣)에 휩싸인 이들은 어른과 아이, 소년과 소녀를 가릴 것 없이 전장(戰場)으로 내몰았고, 8차례에 걸친 이들의 예루살렘 원정은 인류역사상 가장 추악하고 잔인한 전쟁으로 기록됐다.
이교도인 무슬림(muslim)으로부터의 성지회복(聖地回復)이라는 대외적인 종교적 명분과 동방교회에 대한 지배력 확대를 기획하는 실제적인 정치적 목적에 따라 수행된 이 전쟁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이른바 '십자군(crusades)'을 동원하는 데 사용했던 선동의 레토릭은 '신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리라'였다.
광기어린 도그마와 이념적 배타성이 폭력으로 발현되는 경우는 하지만, 비단 십자군 전쟁에 국한되지 않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숱한 전쟁과 폭력의 이면에서 이런 배타성과 도그마는 늘 잠재해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공맹(孔孟)에 대한 주희(朱熹)의 주석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매도하여 배격했던 전례가 있다.

중세의 마녀사냥이 그러했고, 제국주의 시대의 파시즘, 냉전기의 매카시즘이 그러했듯이, 한 사회의 지배적 이념이 광기어린 폭력성을 드러내는 경우는 오히려 소멸되지 않고 여전히 그 형태와 모습을 달리하며 진화하는 중이다. 동아시아에서 근대(近代)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서구적 가치의 유입이 그러했고, 무슬림 제국(諸國)에서 보편적 민주주의(民主主義)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미국적 가치의 유입이 그러했을 것이다.

'한손에는 칼, 한손에는 코란'이라는 스콜라 철학(scholasticism)의 대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 진리는 암흑속에서부터 구별되리라'는 코란(Koran)의 가르침에 따라 이교도에 대한 종교적 배타성을 드러내지 않았던 무슬림들이, 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정작 이제와서 이슬람적 도그마(Islamic dogma)에 빠져들어가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결국 이같은 현상도 자기독단에 빠져 타인을 인정하지 않거나 심지어 부정해버리는 배타적 폭력성에 기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도그마적 폭력성에 기인하여 역사상 가장 잔인한 참상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종교전쟁에서 표출돼왔다고는 하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무고한 인명을 잔혹하게 참수하는 잔인성으로 세계를 경악시키고 있는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 '이슬람국가'(IS)의 행태는 이미 종교적 배타성의 수준을 한참 넘었을 뿐만 아니라 반인륜적 범죄의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테러리즘(terrorism)도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용납될 수는 없지만 제한적으로 불가피한 폭력이나 위협적 수단을 동원하는 경우에 한정된다고 한다면, 이슬람국가(IS)의 행태는 결코 이같은 범주에 포함되지도 않는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도 않을뿐더러 이쯤되면 이들의 정치적 목적이 무엇인지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것이 의미를 퇴색해버리지 않을 수 없다.

무자헤딘(Mujahidin)과 헤즈볼라(Hezbollah), 알카에다(Al-Qaeda)와 탈레반(Taliban)을 거쳐 이슬람국가(Islamic State)로 이어지는 지하디스트(Jihadist)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안에는 서구와 이슬람의 문명충돌, 기독교와 이슬람의 종교분쟁, 수니파와 시아파의 종파분쟁, 다수민족과 소수민족 간의 종족분쟁,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동서냉전, 권위주의 정권과 민중 간의 갈등이 서로 얽혀있는 복잡한 상황이 드러나지만, 정치와 종교, 국제정치와 국내정치가 중첩돼있는 이 복잡다난한 대결구도 속에서 그 분쟁과 갈등의 원인여하를 막론하고 극단주의는 회피할 수 있을 만큼의 이성(理性)의 여지는 남겨졌어야 했다.

천년의 세월을 거쳐 서구유럽이 중세의 기독교적 도그마를 벗어나 합리적 이성을 회복해 갔듯이, 이들 극단주의자들이 하루빨리 이슬람적 도그마를 벗어나 타협과 화해의 장으로 나서기만을 기다려야 할 문제일까? 광기(狂氣)의 자정(自淨), 이성(理性)의 회복(回復), 이슬람 지식인들의 역할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