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창 허애선·고수 조경곤 '춘향가 완창'
10일 인천서구문화회관서 어르친 초청 '자선공연'
▲ 조경곤 고수와 허애선 명창이 오는 10일 오후 인천서구문화회관 소공연장에서 '판소리 춘향가 완창' 공연을 펼친다. 춘향가는 춘향이와 이몽룡의 사랑의 이중창인 '춘몽지가'로 우리나라 대표적 판소리다. 국립창극단원인 허애선 명창이 조경곤 인천무형문화재와 함께 인천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 고법판소리 연구실에서 연습을 하고 있다.
인천시민들이 오는 설날을 앞두고 '춘향가 완창'을 들을 수 있게 됐다.

지난해 10월 권하경 명창과 함께 '동편제 흥보가'를 완창 연주한 고수 조경곤이 을미년 새해 첫 공연으로 국립창극단 허애선 명창과 함께 '춘향가 완창'을 선물한다.

허애선 명창과 조경곤 고수는 오는 10일 오후 1시30분 인천서구문화회관 소공연장에서 듣기 좋고 따라 부르기 좋은 우리 가락을 노래한다.

이날 공연은 특히 설을 앞두고 외롭게 지내는 지역 노인들을 초청해 '갈비탕'과 음료수까지 대접하는 자선공연이라 더욱 의미가 깊다.


인천무형문화재 조경곤 "허 명창 음색 청아·섬세"
타고난 소리꾼 허애선 "조 고수님 집중력 대단"

"본래 우리 음악이 멍석 깔아 놓고 막걸리, 떡과 같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감상하는 진정한 열린 무대였습니다."

이제는 시각장애인 고수보다는 인천을 대표하는 고수로 더 잘 알려진 조경곤 고수는 "우리 음악은 서양의 클래식처럼 특수계층만 향유하는 음악이 아니다"며 "권위적이지 않은 그야말로 서민적이고, 대중적인 음악"이라고 말했다.

조 고수의 고법에 맞춰 춘향가 완창을 하는 허애선 명창은 1997년부터 국립창극단 단원으로 프로활동을 시작, 지금까지 20년 가깝게 우리나라 음악을 대표하는 국립극단의 중요 단원이다.

권하경 명창의 소리가 힘 있고 남성적이라면, 허 명창의 소리는 섬세하고 여성적이라 할 수 있다. 이같은 명창들의 소리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맛'이 있다. 음악에 따라 어울리는 음색이 있기 때문이다.

"허애선 명창은 음색이 청아하고 맑은 게 특징입니다. 따라서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하는 춘향가에 적합하다고 할 수 있지요."

조 고수의 평에 허애선 명창이 화답한다.

"조 고수님은 앞을 보지 못 하면서도 마치 눈을 뜨고 저를 보는 것처럼 호흡이 잘 맞습니다. 어떨 때는 저를 리드하기까지 하시지요. 집중력이 대단한 분입니다."

이처럼 둘이 하모니를 이루다보니 이번에 뜻깊은 공연을 갖게 된 것이다. 허 명창이 소리를 하게 된 것은 '진도'라는 고향의 정서가 많이 작용했다.

"저희 마을에선 사람들이 모이면 애어른 할 것 없이 '소리 한 자락 해 보소'하며 돌아가며 노래를 시키곤 했어요. 또 누구나 노래를 잘 했구요. 그러다보니 저도 모르게 사람들 앞에서 노래 한두자락 하면서 우리 소리를 좋아하게 됐죠."

허 명창은 여기에 특별한 재능까지 갖춘 '타고난 명창'이었다. 진도라는 지역의 특성상 전문적으로 소리를 배울 수 없었지만 고등학교 때 3개월 배운 실력으로 중대 한국음악과에 덜컥 합격한 것이다. 국악인이자 영화배우인 오정해씨도 그의 동창이다.

"고등학교 어느 날 소리 선생님이 진도에 3개월간 들어와 동네 사람들에게 소리를 가르친 적이 있었어요. 어깨 너머로 혼자 하다 그 선생님에게 배웠는데 드디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 때부터 허 명창은 소리꾼으로서의 수업을 체계적으로 쌓았다. 대학시절, 극단활동을 하며 연기수업을 했던 것도 '대명창'이 되기 위한 노력이었다. 소리를 하면 표정과 몸짓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금까지 평생 소리인생의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완창을 하면 보통 명창이 힘들 것 같지만 어찌 보면 고수가 더 힘들 수도 있다. 명창은 아니리, 발림을 하며 무대를 누비며 움직이지만 고수는 꼼짝없이 앉아서 북채를 잡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 고수는 "북채를 잡을 때가 가장 행복하고,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자유롭다"고 털어놓는다.

조 고수는 인천에 정착하면서 자신의 예술세계에 더욱 전념하는 한편, 서울의 '인재'들을 하나 둘 인천으로 데려와 인천사람으로 만들고 있다.

"제가 밥 먹고 북 치고 사는 곳이 인천이 아닌가요. 인천은 저의 제2의 고향이고 그만큼 좋은 우리 음악을 인천시민들에게 들려줄 의무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모시기 어려운 분들이지만 개인적 친분 관계를 통해 자꾸 오시라고 하는 겁니다."

좋은 명창들이 인천에 오면 인천시민들은 그만큼 좋은 음악을 접할 기회가 많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앞으로 10년은 고생할 각오를 갖고 있다. 고생이란 단어는 그에게 매우 친근한 말이다. 고등학교 때 눈을 다쳐 시력을 잃으며, 예술의 길로 뛰어들어 결국 인천무형문화재가 되기까지, 그의 인생역정 자체가 고생이었기 때문이다.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