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체성 찾기] 강덕우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24>불평등 근대의 서막, 강화도조약
▲ 일본 '운요호'.
'강화도조약'이라 불리는 '조일수호조규'는 1876년 1월17일 협상이 시작돼 2월3일 인천 강화도 연무정에서 비준·조인됐다. '쇄국에서 개항'이라는 중차대한 문제가 불과 협상 보름여 만에 성사된 것도 놀랍기만 한 대목인데, 더욱이 최초 협상일인 1월17일(양력 2월11일)이 일본의 개국기념일인 '기원절(紀元節)'이었던 것은, 처음부터 조선을 식민지로하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의지가 내포된 것은 아니었을까? 조선의 '무지'를 악용해서 상호 '무관세(無關稅)'를 내용으로 하는 한국 최초의 FTA를 맺었던 것도 이와 무관치는 않다.

운요호(雲楊號)의 난입
일본은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이어 1868년 수백 년 동안의 막부 체제를 끝내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해 근대 서양의 체제를 모방했다. 거기에 개항을 전후해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일본의 공업은 상품 수출시장을 필요로 했고, 그러려면 조선과의 무역에서 종전의 제한도 없애고 본격적으로 확대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처음부터 무역의 불균형을 전제로 하여 조선의 희생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일본은 조선과의 교섭을 시도했으나 흥선대원군 집정(1863~1873년)하의 한 ·일 교섭은 번번이 결렬됐고 감정대립만 격화돼 부산 일대에서는 재류 일본인들에게 양곡과 연료의 공급을 거부하는 경제봉쇄 사태까지 발생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면서 조선에서도 개국의 분위기가 확산됐다. 한편, 일본은 조선과의 수교를 좀 더 신속하게 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했고, 서구열강들이 동양의 약소국에게 의례적으로 행해왔던 '함포책략'을 선택·결정했다. 드디어 강화도조약을 맺기 5개월 전 1875년 8월21일(양력 9월20일) 일본은 '운요호'를 통해 무력적 함포시위를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은 운요호가 출항하기 전 이미 '사건의 수습책'에 관한 자세한 매뉴얼을 미리 만들어두고 있었는데 "평화적으로 활동 중이던 운요호를 조선이 느닷없이 공격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위권을 발동했을 뿐"이라는 내용을 세계 각국에 주지시켜 피해 보상을 강력히 요구하고, 개항을 협상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이 교섭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청국과 영국, 미국 등 주변 열강들에게 협조를 구한 것은 물론이다.

전함 운요호는 1㎞ 밖에서 조준 사격을 할 수 있었는데 반해, 강화의 초지진에는 최대사거리 700m에 명중률도 낮은 구식 홍이포(紅夷砲, 당시 네덜란드를 '홍이'로 명기)였으니 일방적인 포격전이었음은 명약관화했다. 초지진은 단시간에 쑥대밭이 됐고 이어 이들은 영종도에 상륙해 방화와 살육을 자행했다. 무수한 군기(軍器)와 재산을 약탈하고 돌아갔지만, 조선에 모든 책임을 묻는 음모를 획책하고 있었다.

회담의 경과
1876년 1월15일 구로다(黑田淸隆) 전권대사 일행은 강화도에 기항, 예포라고 하며 각 군함으로부터 위협발포를 하면서 강화도에 상륙했다. 하지만 조선은 청의 소극적 무관심으로 인해 일본에 외교적으로 맞설 수가 없었다. 강화도회담은 1876년 1월17일(양력 2월11일) 하오 1시 강화도 연무당에서 회담이 시작됐다. 1차 회담에서는 주로 운양호사건에 대한 조선의 사죄와 책임문제가 논의됐다. 회담은 3차로 끝났는데 어이없게도 2차는 1월18일, 3차는 1월19일로 연일 속개됐는데, 2차회담 때 일본은 미리 준비된 13개 조항으로 된 조약문을 제시하고 '10일의 기한' 내에 회답을 얻지 못하면 양국간의 국교는 단절된다고 위협했다. 고종은 1월20일 전현직 고위관료들을 소견하고 청의 권고, 박규수와 오경석 등의 개화주장, 고종의 결심에 따라 1월24일 "적절히 협상하여 양국이 편의토록 하라"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회담이 진행된지 1주일여였다. 수모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결국 2월3일 강화부 연무당에서 조일수호조규에 조인하고 비준서를 교환하고 말았다. '근대적 조약'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였다.

짧은 시간에 조선의 위정자들이 졸지에 맺게 되는 조약의 의미와 문제점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기란 무리였다. 조선 내부에서도 회담에 반대하는 신료들의 비중이 오히려 높았지만 그들을 저지할 군사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저 끌려가는 형국이었다. 당시 국제법 하에서는 이와 같은 불평등 조약일지라도 형식적으로 당사국이 합의한 것이라면 유효했기 때문에 강대국들에 의해 이러한 만행이 자행돼 왔던 것이며, 이것이 당시의 제국주의자들이 주창했던 '적자생존'이었다.

조약의 내용과 결과
12개조로 된 이 조약은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제1조)고 했지만, 이는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정함으로써 일본의 조선침략을 쉽게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 밖에도 부산 이외 두 항구의 개항, 해안 측량의 허용 등의 조항이 명시됐다. 그리고 이 해 7월 약관에 따라 일본과 조일수호조규 부록과 무역장정(조일통상잠정협약)을 조인했는데, 개항장에서의 일본거류민 거주지역 설정, 치외법권, 일본화폐의 유통, 양국 무역의 보장, 일본인 운송업 허용, 조선에서의 일본외교관 여행자유 등이 허용됐다. 이로써 조선은 세계를 향해 문호를 개방, 서양의 신문명을 받아들이게 된 반면 열강의 침략을 불러들이는 운명을 맞게 됐다.

일본은 당시 조선 관리가 국제정세에 어두움을 기화로 일반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던 '관세'조항을 의도적으로 조약에 삽입하지 않는 사기적 수법을 동원했다. 농수산품 위주의 조선과 공업생산품 위주의 일본이 무관세로 무역하면 어떻게 될지는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조약에 따라 부산이 개항되고 1880년과 1883년에 원산과 인천이 각각 개항됐다. 관세를 받는 조항이 시행된 것은 이로부터 7년 뒤인 인천에서부터였다. 서구의 근대적 상품이 대량으로 들어오고 봉건사회의 분해가 시작됐지만 일본의 식민지화 정책에 희생되는 단초가 됐고 개항이라는 근대사적 의의는 무산됐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