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체성 찾기] 강옥엽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23> 정신과 사상의 생성지 인천 ② - 향교와 서원
▲ 인천향교.
▲ 충렬사.
▲ 학산서원 터 표지석.
인천의 역사적 성격을 유형화해 보면, '왕도의 공간'과 더불어 '정신과 사상의 생성지'라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단군의 유향이 서린 참성단에서부터 전등사, 보문사 등 전통사찰이 남아있고, 학산서원이나 인천향교 등 유교정신의 실천공간이었던 것이 그렇다. 특히, 고려후기 제2수도 강화도에서의 팔만대장경 조판, 조선시대 강화학파의 근거지, 근대 개항 후 개신교 등의 수용지였던 사실이 이를 설명하고 있다.

조선시대 교육
전근대 교육의 전형은 조선시대 교육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실천하고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전국에 관학을 설립했는데, 중앙에 성균관과 4학(四學), 지방의 부·목·군·현에 각기 1개씩 향교(鄕校)를 두었다. 이외에 초등교육기관이랄 수 있는 서당이 마을마다 사설로 운영됐다.

당시는 교육을 받고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므로 중등교육 기관인 향교에서 수학한 후 1차 과거(소과)에 합격한 사람은 생원, 진사의 호칭을 받고 성균관으로 가서 수학했다. 그리고 다시 대과에 응시해 고급관직에 오르는 자격을 얻었다. 그러다보니 향교가 교육보다는 과거 준비장으로 변질됐고, 이러한 관학의 관료주의적 운영을 타개해 보고자 설립된 것이 서원(書院)이었다.

인천의 향교교육
향교는 성균관의 축소판인데, 문묘(대성전+동·서무)와 명륜당(동·서재)이 중심이며 성현에 대한 제향과 교육을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향교 입학 자격에 관해서는 법제상으로 명시한 것은 없지만, 대략 양반이나 부유한 양인의 자제가 입학할 수 있었다. 향교 학생들의 정원은 행정단위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인천과 부평도호부는 각 70명 정도였다. 입학할 당시의 나이는 16세 정도였고(校生), 최대한 40세까지는 공부할 수 있었다. 16세 미만인 사람(童蒙)도 향교에 와서 공부할 수는 있으나 정규 학생으로는 간주하지 않았다. 학생들에게는 무상교육, 과거응시의 자격, 생원·진사시의 초시 면제, 군역의 면제 등 특전이 있었다.

향교 교육은 과거시험이 실시될 경우와 행사 기간 동안과 천재지변으로 인한 휴가가 있었고, 방학은 농번기와 기근이 들었을 때에 실시했다. 향교 운영의 총책임은 수령이었고, 교수들의 후생, 학생들의 숙식 및 학교 운영 등을 책임졌다.

인천향교는 조선 태종대에 설치됐다고 되어 있지만,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의 것으로 1955년과 1964년에 중수한 것이다. 교동향교는 문묘가 고려 인종 5년(1127)에 설치됐으며, 충렬왕 12년(1286)에 안유(安裕)가 원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공자상을 가져와 우리나라 최초로 봉안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평향교는 계양산 남쪽에 처음 건립됐다가 병자호란으로 소실되고, 숙종 14년(1688) 현재의 위치에 새로이 문묘를 재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화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 창건됐다가 몇 차례의 이전을 거듭했고, 영조 7년(1731)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학산서원과 충렬사
조선시대 인천의 교육기관으로는 향교 4곳과 서원 2곳이 있었다. 향교는 알려져 있다시피 인천, 부평, 강화, 교동향교가 있었고, 서원은 인천의 학산서원(鶴山書院)과 성격은 조금 다르지만, 강화도의 충열사(忠烈祠)가 있었다. 서원은 16세기 이후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인데 교육[講學]과 더불어 선현을 제향(祭享)하는 기능을 담당했던 곳이다. 학산서원은 1708년(숙종 34) 설립된 사액(賜額)서원으로 인천부사 이단상(李端相)을 추모하여 건립돼 인천지역의 인재양성과 풍기교화를 담당했던 곳이다. 정조 10년(1786)에는 인천부사를 지낸 이단상의 아들 이희조(李喜朝)도 배향됐다.

충렬사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는 1543년(중종 38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이다. 이후에 그 전례를 따라 전국적으로 세워지는데, 서원의 면세나 군역 면제 등의 특권을 악용하면서 점차 폐해가 늘어나 금지하는 일이 생겼다. 고종 8년(1871)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가 단행돼 전국에 679개나 되는 서원을 47개만 남기고 다 헐어 버렸다. 당시에 학산서원도 없어졌던 것이다. 학산서원은 삼호현(사모지고개)으로 오르는 길 오른쪽에 있었는데 현재는 그 아래로 터널이 생기고 주변이 밭이 되어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게 돼 지표석만 세워져 있다.

서원은 '무슨 무슨 서원'이란 명칭을 쓰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일부 서원은 사(祠)라는 명칭을 쓰기도 한다. 효제충신을 강조하는 유학에서 일반 서원보다 한층 더 품격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충렬사는 흥선대원군 시기에 서원 철폐과정에서 살아남은 47개의 서원 중의 하나로 우리나라 대표서원이라 할 수 있다.

충렬사는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종묘의 위패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했다가 청군에 의해 강화가 함락되자 남문루 위에서 화약을 쌓아놓고 불을 붙여 순절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과 공조판서 이상길 외 26분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여기에 신미양요 때 순절한 어재연 장군과 그 아우를 모셔 모두 29위의 선열이 배향되고 있다.

인조 19년(1641) 건립하여 현충사(顯忠祠)라 명명했던 것을 효종 때 충렬사(忠烈祠)로 사액을 받았다. 현존 건물로는 사당과 책을 보관하는 전사청, 출입문인 외삼문 등이 남아 있다.

정신과 사상의 구심점
인천에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향교와 서원이 있었다. 흥선대원군 시기 전국의 서원이 철폐되는 과정에서 살아남은 47개의 중요 서원 중에 강화도의 충렬사가 있고, 우리나라 최초로 공자상을 봉안했던 교동향교, 지금은 남아있진 않지만 남구 문학산 기슭에 인천부내에 유일하게 세워졌던 학산서원의 존재는 과거 인천교육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연유에서 19세기 강화도를 중심으로 강화학파의 활동이 생성될 수 있었고, 근대 개항 후 서구식 사립학교가 인천에서 최초로 설립될 수 있는 바탕이 됐다. 오늘날 인천인의 정신과 사상의 구심점은 이러한 교육적 바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