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현의 사진 시간을 깨우다-20. 누구에겐 여전히 필수연료인 19공탄
▲ 동구 송현동에 있던 황해연탄공장의 1960년대 말 모습이다(사진 4장 합성). 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황해도 피난민 출신들이었다. 한 어린 소녀가 5장의 연탄을 올려놓은 빨래판을 머리에 이고 힘겹게 걸어 나오고 있다. 아이는 저 멀리 보이는 수도국산 고개 위 집 까지 몇 번은 가다 쉬다하면서 올랐을 것이다.
연탄, 한 때 연간 70억개 생산된 국민연료

인천 곳곳에 공장 … 공급 모자라 배급제도

현재 지역 1500여가구 사용 … 17만장 부족



인천연탄은행이 올 겨울 후원 받은 연탄은 28만여장이다. 연탄은행이 해마다 인천지역 저소득층 1500여가구에 지원하는 연탄은 45만여장에 이른다. 17만여장이 부족한 상황으로, 장당 500원 짜리 연탄이 없어 추위에 떠는 이웃들이 있다는 것은 빛바랜 사진 속 장면이 아니라 엄연한 오늘의 이야기다.

연탄은 6·25 전쟁 후 1950년 대 초부터 취사용과 난방용으로 상용되기 시작한 이래 한동안 국민연료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해왔다. 지금은 저소득층의 필수연료로 인식되는 연탄이지만 한때 우리나라에서 한해 생산량이 70억개에 이를 정도로 연탄 마련은 한 가정은 물론 한 도시 더 나아가 대한민국 정부가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월동대책 중 하나였다.

연탄은 구멍의 개수에 따라 9공탄, 19공탄, 22공탄 등으로 불리었다. 지게를 지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며 시커멓게 땀범벅이 된 연탄배달부와 꼰 새끼줄에 연탄을 끼고 집으로 가는 가장의 뒷모습 그리고 부서진 연탄 조각들을 모아 물로 반죽해 틀에 넣고 떡메로 쳐서 다시 연탄으로 만들어 벌이를 하던 아저씨의 모습 등은 1960년대, 70년대에 흔하게 마주칠 수 있는 풍경이었다.

당시 인천 곳곳에는 크고 작은 연탄공장이 있었다. 송현동 황해연탄, 창영동 영화연탄, 숭의동 장흥연탄, 신생동 태성연탄, 신흥동 강원연탄, 북성동 인천연탄, 주안 대동연탄과 제일연탄, 부평 한일연탄과 명신연탄 등이 있었다. 이 공장들은 인천지역의 하루 소비 물량 20만개 중 절반가량 밖에 생산할 수 없어 시민들은 연탄에 늘 갈급했다.

1966년도 연탄 파동은 의외의 '사건' 때문에 일어났다. 당시 월남으로 파병되는 군인들을 수송하기 위해 36개 편 열차가 각 지역으로 동원됐다.

그 바람에 강원도 탄광지역으로 가야할 무연탄 수송 열차가 부족해 제때 연탄공장에 석탄 공급을 하지 못해 그해 겨울 시민들은 추위에 떨어야 했다.

1974년 터진 오일쇼크는 대체 연료인 연탄의 품귀 현상을 최고조로 만들었다. 정부는 인천을 비롯한 도청소재지 등 12개 도시에 '연탄판매기록카드제'를 도입했다.

일종의 배급제를 실시한 것이다. 돈이 있어도 마음대로 연탄을 사서 때지 못했다. 시장은 동장들에게 출하증을 배부하고 동장은 지정연탄판매소에 출하증을 교부했다.

지금의 편의점처럼 동네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연탄판매소는 공장에 가서 출하증을 제출하고 연탄을 받았다. 일반가정소비자는 동장으로부터 가구 단위별 연탄구매카드(일명 백색카드)를 받아 판매소에서 연탄을 샀다. 가구당 1회 구입량은 50장 이내로 제한했다. 판매소는 매일 판매량을 동장에게 보고해야만 했다.
시는 공장별로 감독관 2명씩을 상주시켜 생산, 출하, 판매를 통제했다. 이쯤 되면 연탄공장은 사기업이라기보다 관에서 운영하는 공기업 성격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으면 암거래가 생기는 법. 출하증을 웃돈 받고 팔기고 하고 카드를 돈으로 거래하기도 했다.

육지에서 부족하면 섬의 상황은 최악으로 내닫는다. 1980년대 초 인천 앞바다 섬으로 갈 연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게다가 백령도, 대청도 등 5개 섬을 운행하는 선박들이 수송 이익이 좋은 건축 자재 등만 운반하면서 연탄 수송을 기피했다. 1982년 11월18일 하오 3시 인천항 3부두에서 연탄가공선(750톤) 2척의 취항식이 있었다.
'혜민(惠民)호'로 명명한 이 선박은 연탄 제조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이 취항식에 대통령 부인 이순자 여사가 참석했다.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