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22도서관
오래된 역사 불구 서적 수 최하위권
▲ 1922년에 문을 연 인천부립도서관. 이 건물은 원래 세창양행 사택이었다.
금년은 유네스코가 인천을 '책의 수도'로 지정한 해이다.

'책'이라면, 먼저 시민들에게 그를 늘 제공하고 있는 '도서관'을 떠올리게 된다.

한 도시의 품격을 말할 때, 그 도시가 어떤 규모의 도서관을 어떻게 운용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한 방법일 터이다.

그런 면에서 1922년 국내 최초로 인천에서 부립(府立) 도서관의 문을 열었다는 지역사에 눈길을 돌리게 된다. 현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자리에서였는데, 원래 그 곳은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었던 독일 무역상사 '세창양행'(世昌洋行)의 사택이 있었던 곳이다.

빨간색의 서양식 기와, 화사한 크림색의 벽, 아치형 기둥 등으로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했던 사택은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자 적산(敵産)으로 처리되는 비운을 맞았다.

그 후 이런저런 용도로 사용됐던 것을 인천부가 매입해 도서관을 차린 것이다.

'인천부사'에 따르면, 개관 당시의 장서 수는 900권에 불과했고, 이용자 수도 연간 일본인 1242명, 조선인 550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30년대의 조선매일신문(1931. 12. 23.)은 11월 중 1일 열람자가 평균 74명이라고 밝히고 있다.(일본인 626명, 조선인 1220명)

점진적으로 열람자가 늘어나가자 인천부는 1941년 신흥동으로 이전했고, 광복 후 '인천시립도서관'으로 재출범할 때는 위치가 마땅치 않다는 여론에 따라 중구 율목동으로 다시 옮겼다.

2009년에는 정치권이 시민적 합의도 없이 남동구로 또 이전해 갔다.

그렇듯 일제강점기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천 도서관의 역사는 순탄치가 못했다.

인천이 경기도에서 나와 직할시, 광역시로 급성장해 오는 동안에도 무슨 까닭에서인지 도서관만은 OECD의 권장 기준에는 물론 전국 최하위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

고려 때, 대장경을 판각하고, 조선 때 외규장각을 두었던 전통을 잇기는커녕 제대로 된 출판사 한 곳이 없고, 신간서점, 고서점, 도서관 수가 전국 최하위권인 마당에 '책의 수도'를 맞는 마음은 사실 착잡하다. '책의 해'가 기사회생의 대전환점이 되었으면 한다.

/조우성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