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진채 소설가
이사를 했다. 23층 높이의 남향 아파트였다. 오전부터 여린 빛이 거실 전면 창에 비추었다. 창문이 겨울의 바람과 냉기를 거르고 햇볕만 들여보내주었다. 낮 동안 그 햇볕만으로도 거실 실내온도가 2도 올라갔다. 전에 살던 집에서 잘 자라지 않던 화초들도 여린 새잎을 틔웠다. 햇볕이 고마웠다. 집에 오는 사람들에게도 이 집에서 제일 좋은 것은 햇볕이라고 자랑했다.

한낮에 거실에 앉아 있으면 어느새 볕이 닿은 왼쪽 뺨과 어깨, 등이 따뜻해진다. 햇빛이나 볕이 우울증을 예방하는 정신 건강뿐만 아니라 폐나, 피부도 건강해진다고 한다. 꿋꿋이 몸을 세우고 잎을 틔우는 가지를 보니 나도 저절로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아, 이 따스한 햇볕!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문득 햇볕정책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대북정책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 나라의 정책에 필요한 것이 이 한 줌 햇볕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올 한해 우리나라는 '상식의 실종'으로 대변될 만큼 무참하고 어이없는 일들을 겪었다. 이 나라에 과연 정책은 있는 것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있다면 과연 그 정책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묻고 싶었다.
경주 리조트 붕괴, 세월호 등의 사건 사고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고 많은 이들을 아프게 하고 있으며, 이 겨울을 힘겹게 나는 이들 중 누군가는 성탄절에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위정자들은 너도나도 내 밥그릇 챙기기 바빴고, 밀실정치는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물가는 점점 더 오르고, 내년 전망 역시 밝지 않다. 비정규직과 자영업자의 삶은 나날이 어려워지고, 정규직 직장인들도 언제 감원에 걸릴지 몰라 노심초사한다. 여기저기서 살기 힘들다는 한숨이 쏟아진다.

얼마 전 종용한 드라마 '미생'을 일부러 안 본다는 사람을 만났다. 둘 다 회사원이었다. 한 사람은 퇴근해서 집에 왔는데 '미생'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퇴근을 안 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다른 한 사람은 환타지 때문에 안 본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미생'의 오 차장 같은 인물은 직장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의견은 달랐지만 결국 한 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팍팍한 삶이 짓누르는 무게인 것이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새해다. 세월이 나이에 비례해서 빨라진다. 이제는 내년에는…, 식의 어떤 다짐이나 희망을 품기도 겁이 난다. 그럼에도 드라마 속 마지막에 주인공이 내 뱉었던 말을 붙잡고 싶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의 『고향』에 나오는 글이기도 하다. 20대에 한 동안 마음에 간직했던 글귀이기도 하다. 루쉰의 글을 마음에 새긴다.
다시 햇볕 한 줌을 생각한다. 대다수 국민은 산타를 바라는 것도, 로또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많은 어떤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한 겨울 여린 볕이 내는 온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 우리는 겨울 한 가운데 있다. 날씨로, 계절로 겨울이 아니라 마음이 꽁꽁 얼어붙은 한 겨울이다. 발이 저절로 동동 굴러질 만큼 춥다.
새해에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정치, 슬픔을 같이 하는 따뜻한 위로,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바라볼 줄 아는 마음이 햇볕 한 줌이 되어 온 누리에 비치길 소망해본다. 그 햇볕 비추는 곳에 본래 없던 길을 내며 가는 사람 중 한 사람이 되리라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