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21-극장
선대 예술인 10여 편 영화 애관극장 등 개봉
▲ '협률사'의 후신인 '애관'(1950년대 모습), 지역 극장으로 유일하게 문을 열고 있다.
연말 극장가를 두 편의 영화가 뜨겁게 달구고 있다. 진모영 감독의 독립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다큐멘터리 특유의 사실성과 잔잔한 감동을 주면서 개봉 18일 만에 관객 100만 명을 돌파했다. 이런 추세라면, 수년 전의 '워낭 소리'를 능가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다른 한 편은 '해운대'로 화제를 모은 후 제작자로 나섰다가 복귀한 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이다. 6·25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 온 '덕수네' 가족의 이야기를 흥남 철수, 파독, 베트남 파병, 이산가족 찾기 등을 축으로 해 126분간의 러닝타임 속에 압축해 놓았다고 한다.

두 편의 영화가 관객을 불러들이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이다. 축하할 일이다. 동시에 인천에서는 왜 오늘까지 영화 한 편을 제대로 만들어 내지 못할까 하는 의문을 가져본다. 인천은 개화기 이후, 어느 지역보다도 먼저 신문물인 영화를 받아들인 예술도시였다.

1950년대만 해도 영화에 대한 열기가 대단했다. 인천의 선대 문화예술인들은 10여 편의 영화를 만들어 애관, 동방극장 등에서 개봉했고, '사랑의 교실'은 서울 국도극장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이화창고를 개조해 세트장을 만들었던 이야기(계간 '리뷰인천' 참조)는 눈물겹다.

그렇듯 인천이 일찍이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리나라 초유의 신식 공연장을 개설해 극장문화를 일궈냈기 때문이다. 서울에 '협률사(協律社)'와 '원각사'가 생기기 전인 1895년에 이미 인천부 용동(지금의 중구)에 근대적 의미의 신식 극장인 '협률사(協律舍)'가 있었다.

안종화 선생은 저서 '신극사 이야기'에서 '협률사'의 존재를 확인해 주고 있다. 신파극 '육혈포 강도'로 이름을 날렸던 임성구 단장이 '협률사'를 '축항사(築港舍)'로 개명했다고 한다. '축항사'는 그 후 1926년에 영화관 '애관(愛館)'으로 재단장해 오늘에까지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인천은 한때 극장의 전성기를 누렸다. 자체적으로 영화도 만들고, 지역에서 세운 16개의 극장도 운영했었다. 그러던 극장들이 거의 다 문을 닫았고, 외지 영화만 보는 처지가 됐다. 반세기 전만도 못한 '영상문화의 실종시대'를 맞고 있는 것이다.

/조우성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