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체성 찾기] 강옥엽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17> 왕도(王都)의 공간 인천 ③ - 고려 왕릉
▲ 고려 고종의 홍릉.
▲ 강종의 비이자 고종의 어머니 원덕태후의 곤릉.
인천의 역사적 특징으로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왕과 관련된 상징적 공간이라는 점이다. 비류백제의 출현이 바로 미추홀이었고, 특히, 고려시대에는 인천이씨 출신의 왕비를 배출함으로써 7대 80년에 걸쳐 왕의 고향이자 왕비의 고향이었던 곳이다. 여기에 강화도가 몽골의 침입을 맞아 제2의 수도로서 39년간 항몽(抗蒙)의 근거지가 됐는데, 당시의 흔적은 왕릉과 왕비릉으로 남아 그 역사적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고려 왕릉의 구조와 분포
왕릉은 왕족의 지위뿐 아니라 예법에 맞게 세심하게 건축된 복합 시설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왕릉은 대체로 고구려, 신라의 능 형식을 이어받았고, 조선시대에 계승됐다. 신라시대에는 목재로 안쪽을 댄 넓은 구덩이를 마련해 돌로 채운 다음 흙으로 덮는 고분 방식인 한국 특유의 무덤 체계가 나타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사방에 석호(石虎), 상석 등 독특한 석물을 배치하는 특유의 개성이 나타났고 평지뿐만 아니라 산지에도 만들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왕과 왕비를 포함한 왕실 가족의 무덤을 신분에 따라 능(陵, 왕과 왕비, 추존 왕과 왕비의 무덤)·원(園, 왕세자와 왕세자비, 왕의 사친(私親, 재위한 왕의 부모)의 무덤)·묘(墓, 기타 왕실 가족의 무덤)로 나누었는데, 조선 개국 초기에 조성돼 현재 북한 개성에 자리한 태조 왕비 신의왕후의 제릉과 정종의 후릉 2기를 제외한 40기의 왕릉이 서울 시내와 근교에 자리 잡고 있다. 2009년에 40기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고려시대의 왕릉들은 신라 방식으로 지어졌지만 산등성이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시냇물 사이에 지어지는 양상을 보인다. 이 시기의 왕릉은 경계 석주, 석등, T자형 사당, 비석과 비각 같은 새로운 특징들도 갖추고 있고, 호랑이, 사자, 양을 조각한 석물들이 봉분을 둘러싸기도 한다. 능실 내부에 벽화가 그려진 것도 있는데 이것은 고구려 양식이 이어진 것이다. 산기슭에 3~4층 단을 쌓고, 맨 윗단에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른 봉분을 두고, 아래로 석등, 문·무인석, 제향각 등을 배치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왕릉이 크게 다른 점은 고려의 왕릉은 돌을 쌓아 단을 만들고 돌계단을 만들어 그 상단에 봉분을 조성하지만, 조선시대의 왕릉은 동그스럼한 토단 상부에 봉분을 조성한 점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집중적인 도굴이나 6·25전쟁으로 인해 석물들이 파괴·분실돼 대다수는 원형이 많이 훼손됐다.

▲북한의 고려왕릉 현황
개성지역에는 고려 태조의 무덤 등 20여기의 왕릉이 현존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고려시대 재위 왕은 모두 34명(대수 36대)인데, 무덤 임자가 밝혀진 것은 모두 12기이고, 현재 모습이 알려진 곳은 태조 왕건의 현릉과 31대 임금인 공민왕, 왕비 노국대장공주의 쌍릉인 현·정릉 정도이다.

최근 자료에 의하면, 야산 곳곳을 남벌하고 농지를 개간하면서 능역이 크게 축소됐고, 혜종·성종릉의 경우 병풍석과 석축이 파묻혔고, 경종릉은 장명등·석상·망주석이 사라졌다. 신종릉은 잘못된 복원으로 깨진 난간석이 굴러다니고 민묘처럼 왜소한 몰골로 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013년 북한 개성 일대에 집중한 고려시대 유적이 '개성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개성역사유적지구는 개성성곽, 만월대와 첨성대 유적, 개성 남대문, 고려 성균관, 숭양서원, 선죽교와 표충사, 왕건릉과 공민왕릉, 7릉군, 명릉 등 12개 개별유적으로 이뤄져 있다.

▲강화의 고려 왕릉
강화도에는 현재 2명의 왕과 2명의 왕비릉이 남아 있다. 희종(21대)의 무덤인 석릉(碩陵)과 고종(23대)의 무덤인 홍릉(洪陵), 그리고 강종(22대)의 부인 원덕태후의 무덤인 곤릉(坤陵)과 원종(24대)의 왕비 순경태후의 무덤인 가릉(嘉陵) 등 총 4기의 고려 왕릉이 있다. 이들 왕릉은 모두 고려가 강화로 천도했던 시기(1232~1270년)에 조성됐던 것이다.

이들은 천도시기에 강화도에 머물렀던 사실 외에도 인천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주이씨 이자연의 세 딸(인예태후, 인경현비, 인절현비)이 문종(1046~1083)의 비가 되면서 이후 7대 80년간에 걸쳐 왕실과 인연을 맺게 되는데, 특히, 첫째 딸인 인예태후의 아들인 숙종의 후손들이다. 여기에 숙종의 아들 예종과 그 아들인 인종 역시 인주이씨 이자겸의 딸들과 중첩된 혼인을 했었고, 그로부터 희종(21)-강종(22)-고종(23)-원종(24)으로 계보가 연결되고 있다.

현재 고려 왕릉 중, 강화도 외에 남한에 남아 있는 것으로는 공양왕릉이 유일하다. 고려 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1389~1392)은 1392년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면서 폐위됐는데, 태조 3년(1394)에 왕자 석(奭), 우(瑀)와 함께 삼척으로 간 뒤 교살됐다. 그런데 당시 시신을 어디에 묻었는가를 알 수 없어 공양왕릉은 강원도 삼척시와 경기도 고양시 두 곳에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어느 쪽이 왕릉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고려시대 강화도는 대중국무역의 교통로로써 해상교류의 거점의 역할을 수행했고, 고려 후기 제2의 수도로써 왕도(王都)이자 또, 왕실의 보장처가 됐다. 여기에 홍릉을 비롯한 4기의 고려 왕실릉이나 팔만대장경 조판 등 남겨진 유무형의 문화유산들은 남한지역에서 흔하게 접할 수 없는 귀중한 고려시대 자료이다. 개성지역에 남아 있는 대다수의 고려 왕릉과 관련한 남북학술교류의 좋은 계기를 마련해 줄 중요한 자원이기도 하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