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이영태의 한시로 읽는 인천 옛모습
13> 능허대(凌虛臺)
▲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2013', 능허대.
능허대는 백제가 중국 동진(東晋)과 통교를 시작한 근초고왕 27년(372년)부터 옹진으로 도읍을 옮긴 개로왕 21년(475년)까지 사신들이 중국을 향해 출발했던 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인천부사��(1933)에 따르면 "현 송도 해안의 한 지점이라고 생각되지만 아무런 유적이 없어서 확언할 수 없"고 한다.

현재 능허대는 인천광역시 기념물 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연수구 옥련동에 소재하고 있다.

권시(權諰, 1604~1672)가 능허대를 소재로 시문을 남겼다.
 
 細岸通幽逕(세안통유경) 좁은 낭떠러지에 오솔길 나 있고
 平沙落斷丘(평사락단구) 고른 백사장은 절벽에서 끊겨있네
 水崩刳地腹(수붕고지복) 물은 땅을 갈라 헤집고
 天撼蹴潮頭(천감축조두) 하늘은 물마루에서 요동치네
 滄海拓山闊(창해척산활) 창해는 산을 밀어내어 드넓은데
 靑山鎭海浮(청산진해부) 청산은 바다를 누르며 떠있네
 長風驅俗念(장풍구속념) 긴 바람이 속념을 쫓아내니
 遠島出仙舟(원도출선주) 먼 섬들은 신선 배 띄운 듯하네
 (<탄옹집>, '능허대')
 
능허대의 공간 특성과 그곳에서 바다를 조망했을 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백사장에 우뚝 솟은 절벽에 위치한 능허대를 오르려면 좁은 낭떠러지의 오솔길을 이용해야 했다. 작자는 '능허대에서 놀다(遊凌虛臺)'라는 한시에서 '평평한 땅은 이무기 목덜미를 갈라놓은 듯(平地擘蛟頸)'하고 '끊어진 산비탈은 호랑이 머리를 치켜세운 듯하다(絶陘奮虎頭)'며 능허대의 공간 특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그곳에서 조망한 황해 바다는 넓디넓어 섬들이 바다 위에 떠있거나 혹은 그 반대로 섬들이 바다를 누르고 있는 듯 했다. 바다의 광활함에 압도된 작자는 속념(俗念)과 거리를 둔 자가 되었다. 멀리 있는 섬들이 신선의 배로 보였던 것이다.

이규상(李奎象, 1727~1799)도 능허대를 소재로 시문을 남겼다.
 
 白浪驅來地不分(백랑구래지불분) 흰 파도 달려오니 땅이 분명치 않고
 山人初見却疑雲(산인초견각의운) 산 사람이 처음 보니 구름 같네
 雄豪氣勢誰能敵(웅호기세수능적) 웅장한 기세를 누가 맞설까
 萬物中間水爲君(만물중간수위군) 만물 중에 물이 으뜸이네
 (<일몽고>)
 
능허대 위에서 바라본 파도의 위세를 그려낸 경우다. 작자는 밀려오는 파도를 처음 목격해서인지 자신을 산 사람(山人)으로, 포말을 이뤄 밀려오는 파도를 구름이라 했다. 이어 그 기세를 맞설 게 없다며 '만물 중에 물이 으뜸(萬物中間水爲君)'이라 했다.

바다에 대한 작자의 이러한 감동은 능허대의 위치와 무관하지 않다. 작자가 남긴 기록에는 '대(臺)는 겨우 10여 장의 산으로 바닷가 포구에 높이 솟아 있어 마치 인두자루 같다. 사면이 바위를 이고 있고 위에 소나무와 진달래 등의 잡목이 자란다. 내려다보면 바로 큰 바다(臺僅十餘丈山 而高崒於海浦 如熨斗柄 四面戴石 上生松鵑雜樹 俯視直抵大洋)'라며 남기기도 했다.

능허대에 대한 이규상의 관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당연합군의 수많은 병선들이 능허대 앞에 있는 것을 연상하며 <속인주요(續仁州謠)>를 남기기도 했다.

바다를 조망하는 공간이 백사장이건 능허대이건 상관없는 게 아니다. 약간 높은 공간에서 조망한다고 해서 감회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곳이 역사와 관련됐다는 사실을 알고 바다를 조망했기에 일반적인 대상들이 특별하게 포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