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이 우리나라 대중문화사에 큰 획을 긋고 떠나갔다. 88년 대학가요제 출신으로 뛰어난 음악성과 독설로 대중매체의 주목을 받아온 그였지만 50살도 안돼 영면했다는 사실이 우울하게 다가온다. '마왕'으로 불릴만큼 신해철의 카리스마는 남달랐다. 그러면서도 매우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의 음악과 어록에서 신해철의 순수성은 잘 드러난다. 지난 2011년 한 방송에 출연한 신해철은 아내 얘기를 하던 중 "다음 생에 태어나도 당신(아내 윤원희)의 남편이 되고 싶고, 당신의 아들, 엄마, 오빠, 강아지, 그 무엇으로도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넥스트 시절 그가 작사작곡한 '날아라 병아리'란 노래는 한 아이가 육교 위에서 산 병아리를 집에서 기르다 죽어 슬픔에 잠긴 내용을 담고 있다. 동물애호가들은 물론, 일반인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음악이었다. 신해철의 음악이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사운드와 멜로디는 스펙터클하면서도 가사는 섬세하다는데 있다.

신해철의 죽음을 계기로 우리사회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흔히 '대중문화'란 '고급문화'의 대척점에 있는 저급한 문화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신해철의 음악이 대중문화의 대표적 장르인 대중가요였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그의 음악이 저급한 음악이었을까. 그리고 대중음악은 질이 떨어지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흐름은 일제강점기 '엔카'(연가)의 영향을 받은 일명 '뽕짝'에서 시작한다. 이후 광복하면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대중음악이 쏟아져 나왔다. 일본식 5음계가 주도하던 대중음악이 서양 근대음악인 7음계로 변화하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다. '럭키 서울', '청춘 아베크', '샌프란시스코'와 같은 음악들은 대중문화를 강타한 미국 지향의 음악들이었다. 한국전쟁에서 만난 미국은 우리에게 잘 사는 나라, 이민가고 싶은 나라였을 것이고 그런 그들의 음악은 선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70년대 '통기타'음악으로 이어진다. 인천 출신 대중가수 송창식이 이끄는 세시봉이 나왔던 시기다. 세시봉 역시 미국, 영국의 팝송을 번안한 음악을 많이 불렀다.
그렇게 흐르던 우리나라에 음악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대중가수가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고깔모자와 커다란 안경, 두툼한 장갑을 끼고 세 명의 남자가 엇갈리듯 춤을 추며 부르던 '난 알아요'와 같은 음악들은 차라리 대중음악의 혁명처럼 보였다. 이후 우리 대중음악사에 한류음악의 시초인 '걸그룹'이 등장했으며, 싸이와 같은 가수는 한류열풍을 강화했다. 이들의 음악은 국위를 선양하는 것은 물론이고 막대한 경제적 효과까지 거두고 있다. 이래도 대중음악이 고급음악의 대척점에 서 있는 수준 낮은 통속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은 보편화됐지만 비틀즈는 1960년대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한다는 '예스터데이'(Yesterday)라는 음악에 현악기를 처음 사용함으로써 센세이션을 일으켰었다. 대중음악에 고급문화에서만 사용하던 클래식악기를 사용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사회에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가르는 자체가 무리한 시도일지 모른다.
움베르토 에코는 인간이 영원히 살고 싶다면 자식을 낳거나 책을 남기라고 했다. 책 뿐 아니라 창작물은 모두 창작자의 영혼이라고 볼 수 있다. 신해철은 갔지만 그는 영원히 음악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위대한 대중가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