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현의 사진, 시간을 깨우다 - 10. 인천시립교향악단의 모태는 육군정훈교향악단
▲ 1968년 인천시는 중구, 동구, 남구, 북구 등 구제(區制)를 처음 실시했다. 인천시향은 구제 실시 기념식이 열린 시민관 무대에서 제 5회 정기연주회를 가졌다. 요즘과 달리 여성 단원의 비율이 아주 낮은 것이 이채롭다.
육군정훈관현악단 1953년 창단 … 두 차례 재편성 거쳐

66년 인천시향 출범 … 86년 정기연주 100회 공연 달성



가을이 깊어 갈수록 각종 음악 공연이 빈번하게 열리고 있다. 특히 각 교향악단은 그동안 갈고 닦은 새로운 레퍼터리를 선보이기 위해 그 어느 때 보다 분주하다. 인천의 대표적인 교향악단은 인천시립교향악단이다. 이 오케스트라는 1966년 시립으로는 국내에서 서울, 부산, 대구, 전북(전주)에 이어 다섯 번째로 창단되었다.

'70년대편 인천시사'에 의하면 인천시립교향악단은 1966년 5월4일 창단에 따른 조례가 승인됨에 따라 40명의 단원으로 구성되었다. 초대 상임지휘자는 서울음대를 졸업하고 제물포고에서 음악교사를 하던 김중석이었다. 창단 기념공연은 6월1일 오후 7시30분 제1시민관에서 열렸다. 이날은 제정된 지 두 번째 맞는 인천시민의 날이었다. 인천시향은 첫 레퍼터리로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 등 10여곡을 연주했다. 창단 공연에 이어 보름 후 KBS에 출연해 전파를 통해 전국 시청자들에게 창단 신고를 했다.

조례가 통과되자마자 교향악단이 일사천리로 창단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인천에 오케스트라의 토대가 마련돼 있었기 때문이다. 인천시향 창단의 근간은 육군경기지구 정훈(政訓)관현악단이었다. 이 악단은 6·25 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1953년 6월 인천에서 창단되었다. 1957년 해체되었다가 같은 해 인천음악애호가협회교향악단으로 다시 발족했다. 이 교향악단의 추계대연주회가 11월2일 인천시민관에서 열렸다. 이때 지휘자는 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 최영섭이었다. 그는 1964년 동아방송 편곡지휘자로 스카우트되기 전까지 이 악단을 이끌었다. 후에 인천애협교향악단원 대부분은 인천필하모니관현악단으로 재편성되었고 아홉 차례의 연주회를 가진 후 1966년 인천시립교향악단으로 다시 무대에 서게 되었다.

인천음악애호가협회는 1960년 5월19일 동산중학교 강당에서 서울시립교향악단 초청 인천시민위안음악회를 연다. 지역의 문화 예술계 인사들과 남녀 학생들로 신축 강당은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 찼다. 초로의 지휘자가 무대 한가운데 섰다. 애국가 작곡가이자 세계적인 지휘자 안익태 선생이 서울시향을 이끌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천 무대에서 '한국환상곡'을 연주했다.

1981년 인천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인천시향도 한 단계 도약했다. 마침내 모든 단원이 정식으로 봉급을 받게 되었고 85명의 단원으로 3관 편성을 했다. 당시 단원들 대부분은 서울 출신이었고 4분의 1은 유학파로 구성되었다. 비로소 '인천OB밴드부'라는 오명을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이 개관하기 전 인천의 주 공연무대는 주안에 있던 시민회관이었다. 비록 제대로 된 음향시설을 갖추지 못했지만 시향 정기연주회 때마다 1350석의 자리가 꽉 찰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창단 20주년 되는 1986년 3월17일에 드디어 정기연주회 100회 공연을 했고 이듬해 4월에는 창단 이후 첫 해외공연 길에 올랐다. 싱가포르, 홍콩, 자유중국(대만) 등 동남아 3개국을 방문해 베토벤의 에그먼트 서곡, 교향곡 5번 '운명'을 연주했다.

1994년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개관을 맞아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금노상을 영입하고 국제적인 오케스트라 규모의 4관 편성으로 그 면모를 갖췄다. 2010년부터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지휘자 금난새가 지휘봉을 쥠으로써 인천시향은 지역을 넘어 세계무대에서 최상의 연주를 들려주는 명실상부한 메이저 오케스트라로 거듭나고 있다. 2014년 10월17일 인천시향은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340회 정기연주회를 했다.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