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 논설실장
인류의 문명을 급속하게 진전시킨 '인쇄술'이 우리나라에서 태동했다는 사실은 여러 유물과 기록에서 나타난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한 고려주자본 <백운화상초록불조 직지심체요절> 하권 1책은 현존하는 최고 금속활자인쇄본이다. 15세기 독일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약 70년 앞섰다는 건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이다. 이 <직지심체요절>보다 약 150년 앞선 <상정고금예문>(1234)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알려져 있다. 다만 현존하지 않고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기록으로만 남아있다는 한계를 갖는다.
그러나 4년 전, 현존하면서도 <직지심체요절>보다 138년 앞선 고려 금속활자가 발견되면서 고려의 금속활자는 일반화된 문화였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다보성고미술관'이 공개한 '증도가자'와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진위논란에도 불구하고 학계에 새로운 과제를 던져줬다. <남명천화상증도가>는 금속활자로 인쇄한 것을 1239년 목판에 옮겨 새긴 번각본이고, '증도가자'는 <남명천화상증도가>의 원조격인 금속활자다. 고려 무신정권의 수장 최이는 번각본 <증도가>에 '주자본(금속활자본)으로 간행한 <증도가>가 있었으나 더 이상 전해지지 않아 자신이 각공들에게 목판본으로 복각하게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인천이 주목해야 하는 것은 금속활자가 최초로 나온 '시기'이다.

<상정고금예문>과 <증도가>가 역사에 등장한 때는 고려가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몽골과 항쟁하던 강도(江都·1232~1270) 때이다. 눈부신 '문명의 진주'인 금속활자들이 '인천 강화도'에서 나왔다는 얘기다. 몽골과의 전쟁으로 혼란했던 시기, 예술과 기술이 결합한 금속활자를 이처럼 쉽게 제작했다면 고려는 이미 상당한 금속활자 기술을 축적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강화도에 머물면서 고려는 수준 높은 금속활자 제작기술을 목판인쇄술로 전승한다.

고려는 1236년 강화도에 '대장도감'을 설치, '대장경' 판각을 시작한 이래 15년 만에 팔만여개의 대장경을 완성한다. 눕혀서 쌓으면 3200m로 백두산(2744m) 보다 높고, 한문을 아는 사람이 매일 읽어도 30년이나 걸리는 '불가사의'한 보물 대장경 8만 여장이 강화도를 중심으로 판각된 것이다. 팔만대장경은 완성 뒤 150년 간 강화도의 '대장경판당'과 '선원사'가 보관했지만 조선 초인 1398년(태조7년) 서울을 거쳐 지금의 합천 해인사로 이운됐다.
인류 최초의 금속활자,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술, 그리고 그로부터 780년 뒤인 2015년 세계 책의 수도 인천. 고려가 금속활자를 꽃 피운 땅은 수백 년이 지나 세계가 주목하는 책의 수도 역할을 하게 됐다. 잊고 있었던, 그러나 분명한 역사적 사실인 금속활자 탄생지인 인천이 비로소 역사적 책임을 수행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출판, 인쇄문화의 800년 역사를 관통하는 이 장엄한 물줄기 속에서 인천이 해야 할 일은 자명하다. 인천만의 특수한 문화로 보편적 세계의 문화를 꽃 피워내는 일이 그것이다. 얼마 전 새얼아침대화에서 강연한 임마누엘 교수가 지적했듯이 우리나라는 먼저 시작하고도 후발 주자에게 밀려 선두자리를 빼앗기는 실수를 범해왔다. 그는 한국의 전통 문화와 시스템이 세계적으로 우수함에도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 확산시키지 못해 과거 인쇄술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IT강국인 우리나라가 '싸이월드'라는 SNS를 먼저 시작하고도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외국시스템에 밀리는 것이 한 예다. 인천이 세계가 부러워하는 책으로 숭고한 영혼의 도시, 지성과 감성이 조화로운 도시로 브랜딩 할 시기가 내년, 2015년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