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강옥엽의 인천역사 원류를 찾아서
7> 고려시대 인천, 개방과 역동성의 공간
▲ 고려시대 대외 교류
21세기는 다양한 문화 교류와 이에 따른 개방과 역동성이 요구되고 있다. 한류의 흐름도 그렇지만, 지금 개최되는 제17회 인천아시아경기대회 역시 스포츠 교류를 통한 아시아인의 평화와 화합의 자리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천은 이미 1000년전 고려시대에 아시아의 여러 국가들과 대외교류를 통한 개방과 역동성을 경험했던 역사적 공간이었다.

▲10~14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인천
고려가 건국(918)될 때 중원은 당이 멸망하고 5대 10국이 다투는 격변의 시대였다.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동아시아에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고 선진문물을 흡수하려고 노력했다. 고려가 존속했던 10~14세기는 송, 거란(요), 여진(금) 그리고 원(몽골)의 흥기와 변동 속에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가 시시각각으로 변화했는데, 이에 따라 고려정부가 취한 외교정책도 개방과 공존, 혹은 갈등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고려시대 대외교류
일찍이 해로를 통한 대외무역에서 뛰어난 활동을 보였던 고려 왕실은 개성에 이르는 예성강 입구에 위치한 강화·교동·자연도(영종도) 등을 중심으로 대외교통의 거점을 개발하는 한편, 이를 군사적 경제적으로 지원하면서 수도 개성의 남방지역을 방어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부평(수주(樹州))에 설치했다. 안남도호부에는 인천(소성현(邵城縣))과 시흥·양천·통진·김포 등이 포함돼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인천은 '꼬레아'로 서방세계에 알려지는 고려의 국제교류를 위한 관문으로 자리했다.

인천은 고려왕조 누대에 걸쳐 번성해 갔는데, 먼저 인주 이씨의 왕실과의 혼인으로 숙종때 경원군(慶源郡)이 되고, 이어 다시 인종때 인주(仁州)로 그 위상을 높여 갔으며, 고려 말에는 '칠대어향(七代御鄕)'이라 해 경원부(慶源府)로까지 격상됐다. 부평도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에서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됐다가 부평부(富平府)로 고쳐졌고, 강화는 몽골(蒙古)의 침입 때 40년 가까이 제2의 수도(江都)로 자리하면서 대몽항쟁의 중심을 이뤄 그 위상이 극에 달했다.

고려가 몽골의 지배 아래 놓이고, 또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1392) 강화도에 이룩했던 모든 문물·시설과 경원부의 위용이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되고 말았지만, 고려시대 인천은 지역적 역할이나 정치적 위상에서 명실공히 수도 개성에 다음가는 위치에 있었다. 특히, 몽골 지배하에서도 고려의 대외교류는 활발해 개성 외곽에 이슬람의 자치적 거주지가 존속한 것으로 보면, 인천지역에도 일찍부터 외국인들의 집단거주지가 형성돼 국제도시로의 면모를 보이지 않았나 추측된다.

▲해상교류를 통한 개방의 현장, 자연도
고려는 전반기에 걸쳐 예성항을 중심으로 한 해상활동이 매우 활발했다. 그 중에서도 송나라와의 교류가 두드러지는데, 두 나라 사이의 문물 교류는 양국 사이의 외교적 형식을 통한 공적(公的) 교역보다도 사적(私的)인 민간 교역으로 말미암아 크게 이뤄졌다. 이러한 사실은 양국 사절이 왕래한 횟수와 송상(宋商)이 내항(來航)한 횟수를 통해 알 수 있다. 고려 광종 13년으로부터 인종·의종 시대에 걸쳐 고려의 사신이 송나라에 건너간 것이 약 57회, 송나라 사신이 고려에 건너온 것이 약 30회인데, 송상이 건너온 횟수는 약 120여회, 총인원 약 5000명에 달했다는 사실에서 짐작된다.

▲동여도 속의 인천과 자연도
이렇듯 예성항을 중심으로 활발한 해상활동이 전개되는 시기에 자연도(영종도)와 강화 및 교동은 예성강의 관문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삼남(三南)의 물자들이 거의 대부분 서해를 통해 예성강을 거슬러 개경으로 수송됐고, 또한 아라비아나 송나라 상선들 또는 고려의 상선들이 모두 서해에서 강을 거슬러 수도 개경까지 직접 무역활동을 했다. 그러므로 자연도는 대중국무역의 무역항으로 또 강화와 교동은 해상교통의 중심지로 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당시 송은 고려의 사신과 상인들이 통과하는 연로에 고려관(高麗館)이라는 객관(客館)을 세우고 숙식을 제공하는 등 극진한 대우를 했는데, 고려에서도 송나라 사신과 상인이 통과하는 항로상에 객관을 설치해 내왕하는 그들을 대우했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흑산도(黑山島)에는 관사(館舍), 군산도에는 군산정(群山亭), 마도(馬島)에는 안흥정(安興亭), 자연도(紫燕島)에는 경원정(慶源亭), 예성강에는 벽란정(碧瀾亭)이라는 객관이 설치돼 있었다. 이때 자연도는 인천의 속도(屬島)이며, 지금의 영종도이다.

자연도는 경원정 동편에 많은 제비가 날아다녔다고 해 불려진 이름인데, 자연도에 설치돼 있던 객관이 경원정이다. 경원정은 자연도의 태평암(太平巖)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산을 의지해 건립됐고 객관 옆에는 막옥(幕屋) 수십 칸이 있으며 그 주변에는 주민들의 토옥(土屋)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한중간의 교통로는 주로 세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육로로 한반도의 서북경에서 요동지방을 거쳐서 북중국에 이르는 것이다. 해로(海路)는 주로 두 가지가 있는데, 한반도의 서해안에서 산동반도 북안(北岸)의 등주(登州)나 내주(萊州)에 이르는 것과 양자강 하류의 명주(明州)나 양주(揚州)에 이르는 것이 있었다.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가는 항로와 중국에서 한반도로 오는 항로는 대체로 같았지만, 계절과 풍향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있었다.

서해안에 위치했던 인천의 자연도와 강화·교동도는 대중국무역이나 교통로상에 있었기에 비록 출발지나 귀착지 같은 번화로움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중간 거점으로서 대외교류에 따른 개방과 역동의 현장이 됐다.
1000년전 뱃길을 통한 대외교류의 현장이었던 인천은 오늘날 인천국제공항의 하늘 길을 통해 세계와 소통하는 또 다른 개방과 역동적 공간이 되고 있다.

/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